얼마 전, 전 직장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다가 각자가 생각하는 ‘친구가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얘기했었다.
학교를 다닐 땐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것 만으로 친구가 되었는데, 사회에 나와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어야 했다. 누구는 1:1로 몇 번 이상 만나면 친구라고, 누구는 10년은 만나야 친구라고, 그리고 나는 사적으로 만나기만 하면 친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직장에서부터 3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이렇게나 제각기 친구의 기준이 달랐다.
옛 어른들 말로는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면서, 결혼을 하면서, 또 출산을 하면서, 더 나아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바뀐다고 하던데 나에겐 ’난임을 치료하면서’라는 변환점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다. 이 기간에 친구가 달라진다는 것이 어쩌면 유난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전에는 친구가 임신을 하면 한없이 축하만 해줬던 것 같다. 친구가 입덧을 시작하면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복숭아를 택배로 보내기도 했고, 배가 나와 움직이기 힘들면 직접 친구 집 근처까지 가서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난임 기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좁아진 걸까? 친구들의 임신과 출산 소식에 기쁨보다 부러움이 앞섰고, SNS에 임밍아웃이라도 하는 걸 보면 ‘우리는 왜 임신이 안될까?’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렇게 작아져가는 내 모습에 그런 친구들은 만나지 않았다. 오히려 난임을 겪고 있거나 겪었던 사람들을 만났고, 임신이나 결혼이 계획에 없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 하나뿐이었고 사회적으로는 더 고립되는 것 같았다. 사적으로 만나기만 하면 친구가 된다는 내 말과는 다르게 나 편한 대로 친구들을 가려 사귀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 출산한 친구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사실 이전에 두 번이나 약속을 취소했었다. 한 번은 갑작스러운 유산에 자존감이 바닥을 쳤을 때, 두 번째는 그 자존감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나를 이해했다. 친구이기 때문에 날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친구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했었다. 부러움이 아닌 그녀를 완전하게 축하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그때가 지금인 것 같았다.
난임 기간이 언제 끝날지 끝나면 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는, 끝이 없는 터널처럼 아주 길게 느껴지는 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친구들은 그런 나를 잠시라도 꺼내줄 수 있는 창구 같았다. 내가 친구를 멀리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임신을 기다리는 내가 아닌 그저 나 그 자체를 친구로 생각해주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친구가 되고 싶어졌다.
그게 바로 진짜 친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