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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부의 셋째딸 Jan 18. 2022

나는 농부의 셋째 딸이다.

농번기 방학의 가르침

자신이 뿌리고 걷은 것만을 믿고 사는 농부의 1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 두 명의 언니와 여동생, 늦둥이 남동생까지 시끌벅적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도전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도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30년 전에는 농촌에는 '농번기 방학'이라는 게 있었다. 


농번기 방학 

농사일이 매우 바쁜 시기에 학교에서 방학을 하는 것이다.  지역 마 다과 방학기간이 차이가 있었다. 논이 많은 지역은 모심기를 봄에 며칠, 추수를 하는 가을에 며칠 이렇게 주어진다. 감귤 국으로 알려진 제주도는 초겨울에 감귤을 수확하기 때문에 겨울에 하기도 한다. 


아버지께서는 농부의 자식이면 밭에서 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농번기 방학에는 밭에서 체험학습을 했었다. 셋째 딸이어서 위에 언니들이 일을 거의 다 했고, 나는 새참을 먹고 동생과 놀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언니들과 눈이 마주치면 열심히 일을 해야 했다.


가족들과 밭에서 일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부모님께서는 본인이 살아오면서 가장 좋았던 경험과 농사의 특성 등을 자주 이야기했다. 농작물을 자식처럼 키우고 밭에 오면 농작물을 의인화해서 대화를 하셨었다. 그러다 보니 농작물을 수확할 때면 시원섭섭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다. 손님에게 판매하며 떠나보내야 되기 때문이다. 

직원도 가족이지만, 손님도 가족이다.
나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아닌 진심을 다해 거짓 없이 해야 한다


강자와 약자, 높고 낮음 등의 차이는 있으나, 차별은 없는 사회의 구조적 단계의 구성원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이념과 가치를 추구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해 주셨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1년에 한 번씩은 동네에 장애 보육시설을 방문에 봉사활동을 했다. 그 당시에는 봉사점수라는 것도 없던 시절인데, 부모님은 꾸준히 봉사와 사회적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배품을 가르쳐 주셨다. 

중학교 입학 후 봉사활동에 대해 의무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독거노인 돕기를 하게 되었다. 

1주일에 한번 어르신 집을 방문해서 이야기 벗을 해주는 것이었다. 오히려 나를 귀여워해 주시는 할머님께 더 큰 사랑을 받았다. 할머니의 집에는 자식들의 사진이 벽 가득 붙여 있었었다. 


"할머니.. 자식들이 있는데 왜 독거노인이에요?"라고 나는 물었다.

"혼자 사니까.."라고 할머니는 대답했다. 그렇게 할머님과 나는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었다.


 봉사의 마지막 날에는 눈물도 났다. 이유는, 내가 '이렇게 다녀가면 할머니 혼자 있어야 하는 게 더 큰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왜 우냐는 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이유를 말씀드렸다. 할머니께서는 박장대소하며 숨이 넘어갈 듯 웃으시며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다. 오히려 어린 나에 독거노인 돕기 봉사활동으로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나는 어르신들과의 인연이 있다.

세차장 사업을 할 때 경로당과 10m 남짓 떨어진 거리라서 어르신들이 많이 지나가셨다. 경로당으로 향하는 할머니들은 꽤나 귀여우시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경로당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참여할 생각이신지 한껏 즐거우셨다. 그런 할머니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나도 오늘은 장사가 잘될 것 같고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앞을 지나가는 할머니께 두유나 과자, 사탕 같은걸 드리며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러다 할머니 유모차를 수건으로 살짝 닦아 드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쉽게 닦이지 않았다.


"할머니,, 다음에도 또 오시면 그냥(무료) 닦아드릴게요. 오래돼서 안 닦이네.. 이러면 건강에도 안 좋아요!"  나는 할머니께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  "내가 그럴 힘이 있으면.. 이걸 끌고 다니겠냐?.. 하하"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는 웃픈(웃기고 슬픈) 소리를 내며 "맞네~! 내가 잘못했네.. 다음에 오면 진짜 기계로 쏴악! 닦아줄게요!"라고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부모님께서 말씀하시던 '사회 구성원으로 해야 할 일' 이 이게 아닐까?! 


같이 사업하던 친구를 설득해서 동네 경로잔치 때 지팡이와 유모차를 세척해드리기로 했다. 사탕도 몇 시간이 걸려 포장을 하고 100kg가 넘는 스팀 기계까지 끌고 갔다. 스팀 기계로 깨끗하게 새척해 드렸다. 경로당 어르신들은 "우리는 차도 없고 자식들도 이 동네 안 살아서 너희들을 도와줄 방법이 돈 밖에 없다.. 유모차도 차니까 세차비를 받아라!" 하셨다. 하지만 받으면 봉사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전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점심을 얻어먹기로 했다. 

경로당 안에서 식사를 먹으려고 하는데.. 옆동네 어르신들께서 방문하셨다. 친구와 나는 일어나서 식탁을 세팅하고 써빙을 하기 시작했다. 어르신들께서 나와 친구가 착하다고 술을 주셨다. 친구는 술 한잔도 못 먹는 친구인데 90세 어르신들께서 주시는 터라 거절할 수가 없어 조금 마셨다. 그렇게 써빙하며 점심을 먹고 다시 유모차 청소를 했고 모든 일을 마쳤다. 술을 조금 먹은 터라 세차장까지 기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막막했다. 깊은숨을 몰아쉬고 무거는 스팀 기계를 끌며 세차장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엄청 뿌듯해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도 언젠가.. 경로당에 가겠지?.. 그 어르신들처럼 곱게 늙을 수 있을까?.."

"어르신들도 우리 시절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지나가야 그분들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열심히 살자! 아직 30년은 더 남았으니.."


우리의 부모님처럼 자식들에게 잘해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우리 부모님들도 경로당에서 본 어르신들처럼 즐겁게 살 수 있게 우리가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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