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마켓
오천원. 에이리의 통장에 남은 잔액이었다. 아침을 먹지 못하고 집을 나선 에이리는 횡단보도 건너편의 토스트 가게에 들어갔다. 갓 나온 토스트를 호호 불며 값을 치르고 남은 천오백원으로 버스비를 냈다. 물가는 180년동안 균일한 수준을 유지했지만 사람들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에이리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곧 만날 아이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두 아이가 같지 않다는 것은 큰 오류였다. 그러나 에이리는 착실하게 법에 따랐다. 그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오전 11시가 되면 시급이 들어온다. 그러면 적어도 미혼모나 싱글맘의 아이는 살 수 있다. 에이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아이는 둘이 있어야만 하고 그 둘의 미래까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래서 제이를 뒤로 하고 혼자 아이를 보러가는 것이다. 제이는 시간이 되면 알림을 보내올 것이다.
설렘과 행복. 에이리의 요즘 심경은 그러했다. 새로 만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과 한 사회의 일원이 될 아이를 잉태 하였다는 기쁨,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삶에서 새로운 장을 넘기게 될 두려움까지, 에이리는 여러 감정의 변화를 마주해야 했다. 시청에 있는 베이비 마켓은 정오에 열리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가서 줄을 서야 한다. 에이리 또래의 수많은 임산부들이 늘어설 것이다. 동그란 얼굴에 가는 안경테를 쓴 에이리는 그 줄에 파묻혀 잠시 후면 시야에서 가려질 것이다.
다행히 차이티를 만난 에이리는 최근의 근황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인도에서 온 차이티는 에이리에게 함께 준비한 베넷 저고리며 손싸개 같은 아기용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를 혼자서 키우게 될 차이티는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었고, 한편 할머니와 함께 육아를 하게 될 에이리는 잠자코 차이티의 말을 듣고 있었다.
차이티를 만난 것은 십 년 전 초등학교 때이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학교 건물 앞에서 많은 친구들이 마중 나온 부모님의 우산 속으로 쏙 숨어 들었다. 슬픔이 파고 들려는 찰나에 감정의 탑을 막아 선 것은 차이티의 우산이었다. 남색 우산. 회색 빛 하늘을 채운 먹구름과 장대 같이 내리는 빗소리에 귀가 아득할 즈음, 낯익은 얼굴을 만난 친구들의 웃음 소리와 안도가 마음 속을 때릴 때 즈음, 하늘은 별이 가득한 밤 처럼 어느새 밝아졌고, 둘은 사이 좋게 우산을 나누어 쓰고 무사히 귀가 했다.
준비성이 철저했던 차이티는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우산을 챙겼다. 차이티의 어머니는 세련된 앞치마를 두르고 현관까지 마중나와 차이티를 챙겼다. 아버지는 차키를 들고 나와 다정한 말투로 학교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지만, 독립심이 강한 그녀는 우산 만을 챙기고 앞서 걸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차고로 가서 유리로 된 차의 시동을 걸고, 하늘로 날아올라 저 멀리 멀어질 것이었다.
흰색과 분홍색, 에이리는 둘 중 어느 것에도 선뜻 손길이 가지 않아서 내내 망설였다. 보통의 여자아이들은 흰색을 고르고 남자아이들은 분홍을 고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에이리는 자신과 제이 중 누구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할지 난감 하기만 했다. 제이라면 분명 흰색을 먼저 손에 들 것이고, 차이티라면 분홍을 고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에이리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었다. 자신이 흰색을 택하면 제이가 분홍을 골라야 한다고 할 것이고, 만약 분홍을 먼저 고르면 제이의 곱지 않은 눈길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에이리는 잠시 한숨을 쉬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아마 더 나은, 좋은 선택지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후 직원이 와서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에이리는 아이가 곧 입양을 보내져서 이니셜을 새길 첫 턱받이를 고른다고 설명해주었다. 직원은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런 것이라면 모두들 흰색을 택한다고 말했다. 그러했다. 너무 적은 선택지를 두고 고민을 하다보면 옳은 답이 무엇인지 종국에 가서 헷갈리기 마련이다. 에이리는 다행히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답을 찾았다.
입양. 내 한 몸 챙기기도 어려운 처지에 알지도 못하는 생판 남을 키워야 한다니, 무슨 사회 제도가 이렇담. 차이티는 잠시 중얼거렸다. 남들보다 건강하고 팔자 좋게 태어나서 고생 한번 해본 적 없는 그였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으레 친구들이 차이티를 찾았는데, 그것은 구김살 하나 없이 바른 조언을 해주는 그녀의 곧은 성격 때문이었다.
에이리는 언젠가 한 번 그녀의 양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아침 등교길에 펑펑 내린 눈 위로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걸어가던 에이리의 옆으로 다가온 자동차, 양어머니는 그 날 차이티에게 귀걸이를 하고 등교를 할 수가 있니? 하고 나무라며 에이리를 교문 앞에 내려주고는 다시 부르릉 하고 차이티를 태워 집으로 돌아갔다.
에이리는 시리를 깨워 색을 정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시리는 가까운 점포를 훑어보더니 딱 한 곳, 재고가 남아있는 곳이 있다며 위치를 알려왔다. 그저 그 곳에 가서 아이를 뉘어 놓기만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는 긴 공문이 날아들었다. 주차장에 가서 시동을 걸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칠흙 같은 밤이었다. 아이가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고, 두 사람은 지구에서 200km 떨어진 곳에서 창을 통해 빛나는 푸른 빛 행성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 지점이 여행의 시작이 되겠지… 제이는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