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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리아 Aug 13. 2023

흑표범과 민트색 운동화


개운사를 지나 비 오는 길을 걸어갔다.

새 운동화를 신고서.

실은 집에서 반쯤 나왔을 때 후회하였다.

태풍이 지나가서 비가 똑 그쳤는 줄 알았는데,

새 운동화를 신은 게 후회가 됐다.

신으려고 산 건데

너무 예뻐서

신는 게 아까워서

신발장에 두고 오랫동안 바라만 봤다.

그냥 보는 게 좋았다.

예뻐서 기분을 좋게 하였다.



지난달 나는 내게 흑표범이 그려진 민트색 운동화를 선물하였다. 너무 수고 한 나를 내가 위로하고 싶었다. (나는 흑표범을 좋아한다.)


유치하게도 호랑이 학교니까 표범 신을 신고 가야 할 것 같았다. 힘이 나라구.


나는 빨간색을 좋아했는데 요즘엔 민트색이 좋다.

코발트그린 혹은 아쿠아그린.


시원한 청량감이 기분을 좋게 한다.

바다가 보인다.


새운동화라서 뒤꿈치가 까져 걷는데 자꾸 불편하였다.

맞추어 가는 것

길들여지는 것엔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 아팠다. (아파서 눈을 찔끔찔끔 떴다 감았다.)


새 운동화와 발처럼

사람과 사람도

그런 걸까

아픈 과정이 지나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버려지거나

의외로 아픔이 지나고

어? 이제 안 아프네!?

오래 곁에 있기도 하다.

그냥 둬도 되겠네… 하며


무른 것과 단단한 것이 부딪칠 때

부딪쳐서 단단한 것을 무르게 하거나

부딪쳐서 내겐 안 맞는 거 같아

각자의 길을 가자하고

멀어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각자의 길을 가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못 알아먹고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어 봤다.


각자의 길을 가자.

우린 안 맞아요.


그럼 맞는 건 뭘까?

꼭 맞는 게 있을까?

그런 마음을 경험하지 못하여서

나는 혼자 있다.


우린 안 맞아요 라는 말을

각자의 길을 가자.

라는 말을

자꾸 곱씹어 보니

지난날의 상처가 보였다.


처음 누군가를 좋아했던 20대 때

그도 저 말을 했었다.

그 말이 하도 충격적이고 먹먹해서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는데

후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알았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진짜 사랑은

말이 아니라

평생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리고 각자의 길이 아닌

각자의 길 옆에 각자의 길이 서서

부딪치지 않게 하지만 보호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되어 걸어 나가는 거라고


내가 너에게 내가 되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데

내가 너일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되어 줄 거야

라고 말 하는 게 우리의 사랑이다.


그래서 난,

아빠가 돌아가신 날에야

아빠가 날 어떻게 사랑했는가를

생각하면서


나의 상처를 치유해 갔고,

각자의 길과

나랑 안 맞아요라고 말하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봤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각자의 길을 가요

나랑 안 맞아요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은 그 사람에게 처음 듣는 말이고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니까.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주신 사람이라고

믿기로 하였다.


사실 어제, 학술대회 토론자로 나갔는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라는 곳을 처음 가봤다.

길을 찾는 동안 개운사라는 산사가 나왔고

승가 마트를 지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돌길을 걸으며…





마치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개운사

이름도 좋아서

이 길을 지나는 동안

뒤꿈치가 까지고 아팠지만

운이 조금은 바뀌어



너와 나는 각자가 아니라 우리라고

각자의 길이 아닌

울타리의 길을 가기 위해

먼 곳에서 약속을 하고 온 거라고 아름답게 말하는

누군가를 상상했다.


비가 오는 날은

판타지가 열리니까.


그 말을 들으면

까져서 피를 비치는 마음이

아물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 브런치 작가가 됐을 때 연애 이야기 특히 짝사랑에 실패한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합격했는데 동네 챙피해서

못 쓰겠어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는데, 이젠 쓸 수 있게 됐다. 최종 나의 목표는 그 얘기들을 드라마로 써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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