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에 혼자 남겨진 9개월 차 프로덕트 매니저의 3분기 회고록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한 지 한 달이 조금 더 지났을 무렵, 파트 리드(파트장)님이 이직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겨우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항상 일에 열정을 가지고 진심을 다하는 모습에 배울 점이 많았기에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렇게 또 2주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번엔 같은 파트 선임님이 이직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 파트는 파트 리드님이 나가기 전에도 나 포함 세 명 밖에 없는 작은 파트였기에 두 분이 나가게 되면서 혼자 남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파트에 혼자 남겨진 최고 선임이자 막내 PM이 되었다.
일단 지금 산재된 task들을 전부 정리하며 우선순위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작년부터 진행해오던 업무도 있고, 진행하려 했지만 여러 사정들로 인해 진행하지 못 한 업무들도 많았다. 당면한 이슈들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전에 있던 업무들을 전부 들춰내며 왜 못 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중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일이도 지금 딱 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며칠 지나면 하반기 과제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 조금이라도 여유로운 지금 모든 업무를 파악하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업무 진행 현황(task board)부터 새로 만들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정 내린 최우선 과제였다. 기존에 칸반 보드 타입의 task board가 있었지만, 우리는 애자일 조직이 아니라 전형적인 워터폴 조직이었기에 칸반 보드로 이슈 트래킹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연간 업무, 사내 전략 과제, 긴급 배포 건들이 보드에 뒤섞여 한눈에 업무를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다.
가끔 협업툴, 업무 템플릿의 중요성을 가볍게 생각하시면서 "꼭 일 못하는 사람들이 템플릿 따지더라"며, 협업툴은 그저 도구에 불가하니 그 시간에 일에 더 집중하라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건 우리가 '일 잘하는 회사'라고 알고 있는 대표적인 IT 기업들은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업무용 키트(Kit)까지 따로 만들 정도로 템플릿에 집착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혼자' 일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일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우리 파트가 아니더라도, 우리랑 전혀 다른 성격의 팀이 내 업무를 보았을 때, 그게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건 '협업하고 있다'라고 볼 수 없다. (아마 윗처럼 얘기하는 분 아래 직원들은 최소한의 페이퍼 워크 좀 하시라고 속으로 욕하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업무 현황 테이블부터 다시 만들었다. 이렇게 Migrate documentation을 하며 업무 히스토리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각각 어떤 업무인지 파악할 수 있다는 부가적인 가치도 있기에 절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업무 리스트를 다시 짜 보니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던 업무들이 디테일하게 보였다. 언제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중단됐는지, 왜 중단됐는지 파악이 필요한 업무들이 한가득이었다.
이제 업무 리스트는 정리됐으니, 개발, 마케팅, 디자인팀과 미팅을 하면서 각자 생각하는 과제 중요도를 check해 볼 차례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유기적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 열정에 불타올라 레일 위의 경주마처럼 달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비전과 목표를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전파하고 공유하여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내는 게 우리 PM의 역할이니까.
4일에 걸쳐 개발팀, 디자인팀, 마케팅팀, 운영팀과 각각 하반기 전략 회의를 진행했다. 연말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Funnel analysis reports와 VoC report를 보며 최우선 가치를 정의하고, 공동의 목표를 수립했다. 이렇게 우리는 남은 하반기 동안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를 좁힐 수 있었다.
공통된 목표를 바라보는 것을 정리를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는 이제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내에서 최고의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전략을 수립했으니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OMTM(One Metric That Matters)이 생긴 셈이다.
일의 우선순위도 정리되었고, 공동의 목표도 생겼으니 외부의 반응을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VoC reports만 보고 user pain point를 곧이곧대로 이해하면, 우리가 자칫 고객의 목소리를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장의 목소리로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마침 팀에서 사용성 평가(Userability Test)팀을 꾸린다는 얘기가 있어서 참가해보기로 했다. 내가 담당하는 지면에 UT를 하는 건 아니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UT를 하면서 우리 파트에서도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많은 일을 들고 있었지만 꼭 참가해보고 싶었다.
회사가 합병을 하게 되면서 그만큼 연말에는 큰 변화의 바람이 예고되었다. 이미 자회사로 편입되는 회사 측은 구체적인 액션 플랜이 나온 상태지만, 우리는 이제 전략 수립을 끝낸 단계였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당면해야 할 문제라면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UT를 진행하면서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는 브런치에 공유할 예정이다.
시즌은 시즌인가 보다. 담당 개발팀도 거의 다 퇴사하고(회사 매각 때문인지, 이직 시즌이라 그런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1명만 남은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 뭉치자며 남은 우리는 퇴사한 파트원 3~4명의 몫을 해야 하지만 힘들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회사 전략 과제를 일개 사원들끼리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이 주어지더라도, 나는 나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해낼 뿐이다.
나는 화려한 업무 스킬은 없다. 그냥 0에서 1을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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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9. 20 채드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