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읽고 쓰는 데에 문제가 있다면 예체능 과목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유치원 선생님께서 면담을 요청해 오셨다.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한번 정하면 큰 사건이 없는 한 옮기지 않고 한 곳으로 꾸준히 보내는 것이 정서상 나을 것 같아 몇 년을 보냈건만 자잘한 사건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늘 이런저런 해프닝 때문에 선생님과의 면담은 달에 한 번씩은 있었다. 그래서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유치원 방문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아이는 나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사인을 주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뒤늦게 생각해 본다.
"어머니, 귤이가 집에서는 외동이지요? 집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나요. 그래서 친구들이 좋아하고 잘 어울리는 편이긴 한데요...."
이후 이어지는 선생님의 말씀
"친구들이 같이 놀고 싶어서 놀잇감 가지고 놀자고 하면 귤이는 자기가 원하는 놀이가 아니면 굳이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가 놀고 싶은 걸 가지고 혼자 노는 편이더라고요. 제가 볼 땐 귤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어려운 성격이거나 고집이 센 편이 아닌데 또 본인이 좋아하는 활동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서 집에서도 원에서도 조금 주의해서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어머님께 말씀드려요."
그래서 친구들과 더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겠다 싶은 마음에 이참저참 피아노며 태권도며 아이를 학원으로 보내게 되었다. 요즘도 아이들이 학교 보다는 학원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더 많지만 유치원에서 방과 후 활동을 신청해도 7세 반이 되면 초등 입학 전에 기본적인 학원들은 다 보내는 편이고 꼭 학과공부뿐만 아니라 정서와 건강을 위해서라도 보내는 것이 대부분 학부모들 이기에 나 역시 평범한 학부모의 마음으로 학원 문을 기웃거리며 상담부터 받고 섣부르게 결정해 아이에게 통보하는 식이었다. 훗날 이런 양육방식이 얼마나 독이 되었는지는 말 안 해도 불 보듯 뻔한 이야기.
"귤아, 우리 아파트 상가에 모짜르트 음악학원 알지? 내일 유치원 끝나면 거기 가야 해."
왜냐고 묻는 아이에게 적절한 설명을 해주기는커녕
"거기 예찬이도 솔민이도 다닌대. 선생님도 너무 예쁘시더라. 엄마가 가보니까 친구들 간식 먹으면서 재미있게 피아노 배우면서 놀던데?"
"정말? 친구들 다 거기 다녀? 그럼 나도 가볼래."
하며 의욕에 가득 차 귤이도 학원 셔틀에 들어서게 되었다. 물론 간식과 친구들이라는 말에만 꽂혀버린 7살 아이에게 음표며 계음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한 일주일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게 잘 다니면서 친구들과 논다고 인형이며, 카드놀이를 들고 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같이 간식 먹고 싶다며 집으로 우르르 몰고 오기도 했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되자 음악노트에 아이 글씨보다 선생님의 빨간 색연필 색이 더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석 달을 꽉 채우지 못하고 아이 입에서 그만 다니고 싶다는 말이 숨 쉬듯 나왔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한글의 자음모음과 마찬가지로 음표의 위치와 자리도 익히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
이후로 피아노 학원은 3번을 옮겼고 태권도도 마찬가지로 서너번을 옮기게 되었다. 영어학원과 미술학원 역시 상가 안에 있는 곳 말고 유치원 근처와 학교 근처로 몇번을 옮기며 다녔지만 도무지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떠돌기만 했다. 그때 알았다. 우리 애는 학원 스타일이 아니라 과외 스타일이었다는 것을. 아이들 대부분 진도를 맞춰 따라가는데 내 딸은 자존심에 모른다고도 못하고 억지로 억지로 아는 척 하며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울며불며 안가겠다 하는 녀석을 억지 쓰는 거라고 생각해 학원까지 데려다 주고도 맘이 안놓여 학원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것도 그때는 안쓰러운 마음에 했던 행동이었지만 차라리 과감하게 그때 학원을 끊고 하고 싶은 것만 시켰더라면 어땠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