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은 것들에 분노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확산되고 고국으로 속속들이 귀국하는 유학생들에 분노했다. 한국이 확산세가 심할 때는 해외에 머물다가 되레 방역시스템 잘 돌아가고 대처가 믿음직하자 귀국을 서두르는 걸 보면서 한 번 더 분노했다.
쉬운 글을 써내며 책을 잘 팔아먹는 작가들에 분노했다. 옛 싸이월드 눈물셀카 아래나 적혀있을 법한 감성에 젖은 글을 쓰고 책으로 엮어 판매하는 것에 분노했고, 그것들이 잘 팔리는 것에 또 분노했다.
나는 더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인간에게 그 괴리감은 아주 오랫동안 인생의 난제였다.
오히려 신분제 사회에서는 평생의 제 역할이 정해져 있어 제 분수만 잘 알면 되었지도 모를 일이라 푸념할 만큼, 현대인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상대적 박탈감마저 느끼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에서 ‘상대적’이 사라진다면 그건 개인 삶의 영역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 친지 친구 동료들 선에서 위로 충고 배려 격려 정도로 다시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상대적’이라는 한 단어의 내포는 이것이 결국 사회의 문제라는 점이다.
‘분노사회’라는 책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고, 내용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알게 된 사실, 이런 나의 분노와 적개심들을 쥐어짠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스스로 더 대단한 것 더 멋진 것을 내놓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러면서 나를 점점 괴롭혔다. 그러던 중에 코로나가 찾아왔고 그나마 유지되던 일상의 타임테이블 마저 무너졌다. 우원재도 아닌데 시차가 생겼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해가 뜨고 잔다.
그래, 내 세대가 아프니까 청춘이었듯이 지금 시점에도 누군가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가 먹고 싶을 수 있고, 모든 순간이 너였을 수도 있고, 보노보노처럼 살아서 다행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게 푸우든 뭐가 됐든 간에.
하상욱은 스스로를 시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시팔이’라는 다소 격하하는 듯한 네임텍을 자신에게 붙였다. ‘시인’이라는 이름의 사람들과 존재가 다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른 존재이기에 그의 시가 유통되는 과정도, 담고 있는 정서도 다르지 않은가.
나는 내 인생이 참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모두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4년제 대학 나와서 대기업에 들어가는 사람은 취업 준비자 중 한 자릿수의 비율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아주 아주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주도하고 만들었던 모든 특별한 것들이 평범하게 되돌아오고 있다. 꼭 밀란 쿤데라의 책이 아니더라도 읽을 가치가 있고, 누군가에게는 특별하다. 더욱더 각자의 사정과 형편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런 맥락에서 내 삶도 충분히 매력 있고 특별하며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따라서 나의 글도 다분히 유의미하다.
어릴 때 탁구를 배웠다. 국가대표 코치님이었는데 라켓 쥐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는 스윙을 알려주시며 어깨에 힘을 빼라고 하셨다.
여태껏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누가 무시할까 미워할까 비난할까 조롱할까.
자, 이제 힘을 빼본다.
그리고 스윙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