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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정민 Jul 14. 2019

당신의 생각은 통제당하고 있다.

프로파간다 / 대중선동

*본 글은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채정민의 소논문  '문화란 무엇인가 - 사고를 지배하는 문화, 프로파간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아울러, 내용의 출처는 참고문헌으로 밝혀 놓았습니다.

  

최근 들어 뉴스를 접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이유인즉, 새로운 소식을 접한다기보다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필자를 흔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을까? 


 사고를 지배하는 문화 – 프로파간다(선전)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은 매우 다양하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우연한 사건들부터 매체를 통해 접하는 광고와 뉴스, 심지어 오락성이 짙은 프로그램 영화나 쇼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향을 받는 것들이 문화콘텐츠이며, 과연 우리가 매체를 벗어나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냐는 것이다.

 프로파간다(선전, propaganda)의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른다 그런데 선전이 대중매체(최근에는 멀티미디어 통신)의 발달로 폭발적 전파력을 갖추고 세계 곳곳의 분쟁에 이용되면서 급성장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1916년 당선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은 반전 공약으로 당선이 되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중이었는데, 반전 세력의 힘을 입어 선거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당선이 되고 나서 전쟁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문제는 전쟁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반(反) 독일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연방공보위원회(United States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라는 연방 선정 기관을 미국 최초로 만든다.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첫 프로파간다(선전, propaganda)였다. 결국 국민들은 호전적인 애국주의에 광분하였고, 미국은 몇 달 만에 전쟁에 참가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프로파간다의 성립 조건

 미국의 선전가 월터 리프먼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선전 정책이 크게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 이후 귀스타브 르봉(Gustave Le Bon), 그래이엄 월러스(Graham Wallas), 존 듀이(John Dewey) 같은 사상가의 저작을 두루 보았다. 그리고 리프먼은 현대 대중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이상향’은 불가능하다는 음울한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현대 대중 사회의 일원들은 대체로 명쾌한 사고나 인식 능력이 부족해 집단 본능과 단순한 편견에 사로잡히기 쉬울 뿐 아니라 결정을 내리거나 진지한 담론을 전개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해 외부 자극에 오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뭉뚱그려 얘기하기에는 부족하다. 프로파간다의 성립 조건을 알아본다.


  개인주의 사회와 대중 사회

 선전이 성공하려면, 우선 사회가 상호 보완적인 두 성격을 가져야 한다. 개인주의적이고, 대중적이어야 한다. 이 두 성격은 자주 대립한다. 개인주의적 사회는 개인이 집단보다 상위적 가치를 가지며, 개인의 행동을 제한하는 집단을 타파하려는 사회이다. 반면 대중 사회는 개인을 부정하고, 개인을 하나의 숫자로 간주한다. 어떻게 상충되는 성격들이 공존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두 성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적으로는 개인주의적 사회는 대중 사회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개인 해방의 첫 번째 운동은 전체 사회의 유기적 제도인 소집단들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절 속에서 개인은 가문, 마을, 회사, 교구, 혈연적 유대에서 해방되고, 전체 사회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결국, 개인들이 지역적 구조들에 의해 함께 묶여 있지 않을 때, 개인들이 함께 살아갈 유일한 형태는 유기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대중 사회일 수밖에 없다. 역으로 대중 사회는 그 정체성이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고독한 개인들 위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통신의 발달로 인해 각 개인은 공간적으로는 혼자 있으면서도, 타인과의 정보와 의견의 교류가 가능하다. 최근에 들어서는 모바일 기기들의 발달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허물며 이 같은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 

 그러나 결국 개인들로만 구성된 사회는 결과적으로는 분해된 사회가 되고 만다. 또 혼자 남은 개인은 무방비 상태이다. 그 개인이 사회적 흐름 속에 잡혀 있으면 더욱 심하게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래서 선전의 쉬운 사냥감이 된다. 또 다른 사회적 조건으로는 여론이 있다.


  여론

 일차적 집단들, 소집단들 속에서 형성되는 여론은 포괄적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여론과는 전혀 같은 성격이 아니다. 개인들 사이에 직접 접촉이 이뤄지고,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지배적인 관계인 집단 속에서는, “여론”의 형성 과정은 이런 직접적 접촉에 종속된다. 그리고 여기서 여론을 결정하는 것은 “지배적인 의견”이다. 그런데 이 지배적 의견이 집단 전체에게 본능적 방식으로 같은 의견을 강제한다. 즉 소위 말하는 빅마우스들에 의해 지배적인 의견이 조성되고 이는 곧 그들의 의견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형성된 여론을 다수의 의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를 논하기에 앞서 이렇게 형성된 여론의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먼저 여론은 대부분이 정보의 경로에 종속된다. 즉 결정을 내려야 할 사실에 대해 개인들에게 알려 줄 제도화된 정보 채널이 사회 속에 있어야 여론이 형성된다. 그런데 이런 매체에 의한 정보는 ‘보이지 않는 검열’을 기본적으로 거치면서 생산된다. 이것은 비단 정치적 통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인 제약을 통해서도 전달하려는 정보를 충분히 변형시킬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매체에 대해서 다룰 때 추가로 설명하겠다.

 두 번째 특징은 이 여론이 아주 많은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므로 단순화시켜 정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똑같은 사실에 대해 똑같은 해석을 할 수 없다. 각자 삶에서 경험한 것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문화와 사회적 상황 혹은 언어까지 다르다면 분명 여론이 하나로 모아지기란 더 어려워진다. 

 마지막으로 이 여론은 직접 표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여전히, 여론을 한 방향으로 모으고, 표현 수단을 제시하는 도구들이 필요하다. 형성된 여론이란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선거에서 정당, 단체를 통해서 신문이나 여론 조사 등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은 너무나 불충분하다.

 정리해보면 정보가 들어오는 시작인 매체에 의해 편집된 정보를 접하고, 각자에게 받아들여진 정보는 가진 경험과 생각의 바탕이 다르므로 상이한 해석을 낳고 응집되지 못한다. 그렇게 형성된 개인들에 의한 여론은 여론으로 존재는 하나, 표출될 경로가 없기에 표출되지 못하고 고여 있게 된다. 존재하나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이다. 원인을 찾자면 아마도 그 시작을 봐야 할 것이다. 여론 형성의 처음은 정보를 접하면서 시작된다.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는 정보를 어떻게 왜 편집하는가?


  대중매체

 프로파간다(선전, propaganda)에 있어서 대중매체의 입지는 절대적이다. 만약 대중매체가 없다면, 현대 선전은 있을 수 없다. 20세기에 프로파간다가 유난히 성행한 것도 대중매체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개인이 매체가 전달할 만한 사건을 직접 경험한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선전을 하기 위해서는 대중과 그 사건 사이를 가로막는 어떤 장애가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스스로 현명하다거나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할 만한 의사 환경을 만들어내기 전에, 현실 환경에 접근할 수 없도록 제한해야 한다. 왜냐하면 직접 접촉한 사람들은 그들이 본 것을 오인할 수도 있고, 각 매체는 그들의 프레임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즉 대중매체가 없다면, 현대 선전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느 상황에서나 자동으로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의 생산에는 집중적 통제가 있어야 하고, 그 생산물은 확산되어야 한다. 영화, 신문, 라디오 방송이 중앙집중식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선전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실제상황이라고 생각하는 TV토론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정치적 이슈 혹은 사회적 이슈를 놓고 토론할 때, 해당 언론사(혹은 방송국)에 따라 사회자를 세우고 그 사회자가 동등한 의견의 피력을 방해하거나, 심지어 그 정도까지도 조절할 수 있다.

 이는 사회자가 가진 권한 때문이다. 사회자는 발언권을 배분하고 중요한 신호들을 보낸다. 사람들은 언어만큼 시선, 침묵, 몸짓, 흉내, 눈동자의 움직임 등으로 말한다. 따라서 사회자 자신도 이런 방식으로 토론의 분위기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나아가 사회자 사진도 무의식적인 언어와 질문하는 방식·어조 등으로 토론에 개입한다. 만약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하세요, 당신은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거나, “당신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파업에 대해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을 때 상대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감사하다’는 표현 방식이 있다. 보통의 ‘감사하다’, ‘고맙다’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어조이냐에 따라 ‘좋습니다, 끝났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갑시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신문이 더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신문을 사기 때문이다. 그 신문 속에서 독자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발견하고, 자신의 반영을 본다. 그리고 그는 꼭 이 신문만을 원하게 된다.

 신문이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신문사도 다른 사기업과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소유·통제하며 그들이 여론조작 과정에서 지배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스스로의 존재를 은폐하고, 영향력을 부정하며, 공익을 위하는 척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중 여론을 일정한 방향으로 통제한다.

  프로파간다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 조작을 당하는 대중에게 세상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 할 때 조작은 성공할 확률이 높다. 조작자의 의도가 드러날수록 조작당하는 쪽의 저항이 거세지기 마련이므로 조작은 의도성을 숨기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모든 이해관계의 득실을 초월하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믿게 해야 한다.

 힘 있고 영향력이 있는 권위자가 전략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통제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그럼 프로파간다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나?



  프로파간다 벗어나기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것으로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의식세계’가 분명 태어났을 때는 비어있었고 ‘내가 지금 생각하는 바’들도 내가 태어났을 때는 없었던 것이다. 각자 살아가면서 생각을 형성했고, 의식세계를 채웠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존재인 양 착각하지만, 일찍이 칸트가 지적했듯이 ‘생각하는 바에 관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다. 나 또한 생각하는 존재이긴 하나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바’에 관해 자유로운 존재는 아닌데, 그럼에도 ‘내가 지금 생각하는 바’에 따라 살아간다. 따라서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프로파간다를 벗어나기 위한 출발점이자, 자기 성찰을 이루는 주춧돌이 된다.



 결론

 사람들이 다른 문화를 서로 배워, 자기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고 남의 문화 향상에도 기여하는 일은 곧 인류 공동의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는 일이다. 다만 사람의 능력의 주체성 내지는 자기 정체성의 바탕 위에서 제대로 발휘되는 것이 옳다. 본질의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이라면, 자기 집단의 고유문화를 더욱 세련화하는 일은 자기 집단의 번영에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 출발은 개인과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사상과 철학이다. 

 인간의 사상과 철학은 가정, 학교, 또래집단 등의 성장환경을 비롯해 노출되는 미디어 등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다. 문화에 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문화콘텐츠를 형성하는 인간의 생각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주체적인 생각을 하고 싶은 필자의 소망이 프로파간다라는 주제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얕게 다루게 된 아쉬움이 크다.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매스미디어의 쏟아지는 정보들에 휘둘리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프로파간다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어쩌면 꼭 부정적인 의미인 것만은 아니다. 경영학에서는 마케팅이 될 수 있고, 수사학에서는 설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인문학에서는 ‘거짓’이라 명명할지도 모르겠으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것임은 분명하다. 선전에 동요되기 전 선전의 내용들이 우리의 생각의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은 아닌지, 또는 우리가 어찌 행동하도록 조장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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