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책’을 만들려면 여행과 이야기를 선택해야 한다

쉬운 설명으로는 '주제'와 '컨셉'이 필요하다

by 별연못

‘나만의 여행책 만들기’ 수업이 시작됐다. 선생님이 만든 예쁜 책들도 보고, 독립출판과 독립서점 얘기도 들으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같이 수업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하나씩 들으면서 왠지 풋풋한 감성이 돋아나기도 했다. 이 수업이 끝나는 5~6주 후에는 나도 작은 여행책 하나 갖게 될 거라는 꿈을 꾸며 흐뭇해졌다. 귀여운 일러스트 이미지가 그려진 표지가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현실의 난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


선생님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쳤고, 누구나 자신의 여행 경험을 이야기에 담아 책을 만들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혹여나 수업 기간 중 다 끝내지 못한다 해도 언제든 물어볼 수 있도록 채널도 알려주었고, 다시 듣고 싶은 내용이 생기면 언제든 수업을 청강하러 와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책에 담을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여도 좋았고, 몇 페이지에 담아낸다 해도 괜찮았다. 편집 같은 기술적인 부분도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간편한 방식을 택하면 될 일이었고, 재정이 여의치 않으면 않은 형편에 맞춰 만들면 될 일이었다. 아주 작고 소중한 몇 권만 만들어 가까운 지인과 추억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포기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한 글자라도 채워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응원해주었다.


몽글몽글했던 마음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그래, 하나 만들어보자. 이번에는 연습한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서 수업 끝날 때 어떤 크기가 됐건 손에 잡히는 실물을 하나 만들어보자.’ 고민을 너무 많이 하고, 결과에 대해 너무 따지다보면 5~6주가 다 지나갈 때까지 시작도 못할 것 같아 일부러 더 마음을 가볍게 먹었다. 아내에 대한 눈치가 보여서 이왕이면 더 멋드러진 결과물을 만들고 싶기도 했지만, 끝내지 못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손에 잡히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누구든 할 수 있어요!’라는 응원과 함께 첫 수업의 또 다른 결론은 ‘어떤 여행 이야기를 할 건가요?’였다. 수업을 듣는 내내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뭐라도 만들자!’ 하는 다짐을 반복한 뒤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는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여행을 안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색 있는 여행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채화 같은 마을에서 한 달간 살아본 적도 없었고, 극지나 오지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저 남들 다 하듯 대학생 때는 유럽에 한 달 간신히 갔다 와 봤고, 직장인이 된 뒤로는 어렵게 어렵게 동남아 등에 3~4일씩 갔다 온 것이 다였다. 그나마 살짝 길고 인상적이었던 것이 신혼여행이었는데, 요건 왠지 나중에 더 잘 풀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직도 쓰지 못했다)


고민하던 중에 ‘팔릴 만한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님이 떠올랐다. 나 좋은 이야기를 나 좋은 대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니 그저 신나서 떠들 수 있는 얘기면 족했다. 그런 얘기라면 당연히 대학생 때의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여행’이란 것에 눈 뜨게 해준 순간이었고, 지금까지도 ‘여행작가’라는 것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릴 정도로 여행에 빠지게 만든 시간이었다. 낯선 곳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 경험이 비록 ‘삽질’이라 할지라도 좋았다. 여행 중에 만나는 것은 노숙이라 할지라도 특별했다. (잘 곳을 못 구해서 아파트 계단에 앉아 졸며 밤 샜던 얘기는 가장 큰 무용담이 됐다) 그러니 10여 년 전에 블로그에 3개 밖에 올리지 못했던 이 가슴 뛰었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가장 컸다.


서랍에서 외장하드를 꺼내 그 시절 사진들을 찾았다. 한 달간 썼던 일기는 손으로 쓰던 다이어리였기에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고이 잘 모셔둔 덕에 찾기가 너무 힘들어서 일단 사진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야- 그래그래- 이거였지-’ 순간 추억여행에 갇혀 몇 십 분을 흘려보냈다. 한참을 즐거워하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정리하지?’라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뭔가 아득해졌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다음에 쓰기로 했다. 첫 번째 배낭여행, 그리고 신혼여행 같은 살짝 더 특별한 여행은 이번 연습을 끝낸 뒤 본격적으로 다뤄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핑계는 찾을 수 있다) 조금 더 이번 연습에 어울릴만한, 그러면서도 만족할만한 그 어떤 여행 기억을 찾기로 했다. 러시아 얘기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모스크바’와 ‘볼고그라드’라는 도시도 나름 특색 있었고, 몇몇 에피소드도 있었다. 회사 친구와 둘이 호주를 갔다 온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대단히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남자 둘이 계획에도 없던 여행을 명절 도피처럼 가게 됐다는 전제 자체가 괜찮을 것 같았다.


몇몇 후보들을 꼽아보다가 ‘어떤 여행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일단 여행지에 대한 정보인지, 여행 관련 수필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했다. 당연히 여행 에세이였다. 가이드북을 만들 만한 정보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꼼꼼히 찾아보고 기록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행 에세이를 쓰는데 있어서 어떤 순간, 감정, 생각들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봤다. 낯선 장소에 대한 느낌,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순간, 홀로 거닐며 생각했던 단상 등등 무얼 쓸 수 있고, 무얼 쓰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럴듯한 말로 ‘주제’와 ‘컨셉’을 정해야 했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봤다. 여행은 여행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사람과 함께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여행지는 풍경과 음식, 향기 등으로도 기억에 남았지만,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로도 기억에 남았다. 한 달 유럽 배낭여행 때도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어디 한 곳을 딱 꼽기가 어려웠다. 여기서는 그 친구들을 만나 재미있었고, 저기서는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 재미있었다. 여행지마다 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행책을 처음 만들어보려던 그 당시의 언저리에는 주로 ‘가족’과 여행을 다니고 있었고, 아내, 부모님, 처가 식구 등과 함께한 여행이 주를 이루면서 ‘여행이 가족 사이에 특별한 추억을 남겨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던 시점이었다.




가족 여행 시리즈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행지도 특별할 것 없었고, 기간도 휴가 안에 구겨넣은 3~4일 정도였지만 아내와 함께 쌓은 시간들, 처가 식구들과 함께하며 조금 더 알게 되고 깊어지게 된 순간들에 대해 한 권씩 만들어 나눠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로는 연습 삼아 하기에 부담 없는 부모님과의 베트남 여행기를 쓰기로 했다. 동생과 아내는 휴가가 맞지 않아서 아들(나) 혼자 아빠 엄마를 모시고 떠났던 3박4일의 여행을 잘 담아보면 좋겠다 싶었다. (결국 이 첫 번째 시도 이후 시리즈는 여전히 연재되지 않았다) 평소 연락도 잘 챙기지 못하는 아들이 모든 일정들을 준비하고, 4일 내내 엄마 아빠와 딱 붙어서 낯선 곳을 다니며 느꼈던 것들을 풀어내는, 약간의 감동 코드도 찾아볼 수 있는, 부모님과의 여행 이야기가 담긴 나만의 여행책을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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