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책 만들기’ 수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만의 책을 만들 수 있다던 수업 목표는 점점 현실이 되어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했고, 이야기를 글로 썼고, 글과 함께 사진을 얹혀 편집도 했다. (ppt로 한 편집이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수업 말미에는 편집한 것을 출력해 가제본도 해보았다. 정말 무언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토요일 아침 수업이 신기함의 시작이었다. 듣고 있던 수업은 평일 저녁 반이었지만, 딱 한 번 토요일 오전에 수업이 진행됐다. 충무로에서 만나 종이를 고르고 샘플로 몇 장 출력해보는 시간이었다. 수업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텍스트와 이미지로 된 종이 샘플은 찾아볼 수 있었어도 실제 그 종이가 어떤 질감을 갖고 있는지, 두께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만져보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마음에 든 종이에 실제 출력을 했을 때 어떤 느낌인지도 눈으로 보기 쉽지 않았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생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됐다.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는 프렌차이즈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침 10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토요일 치고 이른 시간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했는데, 그 넓은 커피숍이 텅 비어있었다. 아르바이트생도 손님을 맞는 것이 당황스러워 보이는 주말 아침이었다. 쭈뼛쭈뼛 커피를 시키고는 이 넓은 곳 중 어디에 자리를 마련하면 좋을지 어색하게 둘러보았다. ‘그래도 10명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려면 저 끝 쪽이 낫겠지?’ 왠지 우리 모임이 끝날 때까지 손님이 안 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며 한쪽 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충무로의 토요일 아침은 정말 명절 때만큼이나 한가해보였다)
곧 선생님에 이어서 수강생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고요했던 공간이 급작스레 떠들썩해졌다. 늘 활기 넘치는 선생님이 가장 큰 몫을 담당했고, 주말 아침 늦잠을 내려놓을 만큼의 열정을 장착한 수강생들도 도움을 주었다. 다들 대체 뭘 하게 될지 궁금한 눈치였다. ‘충무로’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자체도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영화판을 대표하는 단어이긴 했지만, 두 번째 뜻풀이 정도에 인쇄소들의 집합체라는 것도 담겨있다는 것을 모를 만한 사람은 없는 모임이었으니까.
모인 뒤 설명이 길지는 않았다. 대략 어떤 내용으로 진행될지는 이전 수업에서 간략히 안내가 되었기에 복잡하고 길게 설명할 것은 없었다. 몇 가지 이야기들 뒤에 동선을 한 번 더 체크하고는 다 같이 커피숍을 나섰다. 동선 끝은 다시 이 커피숍이었는데 거의 우리의 사무실 같은 분위기였다. (사무실 치고는 음료를 마실 때 돈을 내야 하긴 했지만)
한 블록 못 되는 거리를 걸어 어느 건물 2층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작은 서점 같은 그곳에는 책 대신 종이가 진열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도 놓여 있었고, 벽에도 걸려 있었다. 거기에서는 ‘그냥 하얀 종이’라는 것은 없었다. 하얀색도 조금씩 달랐고, 두께도 달랐고, 질감도 달랐다. (가격도 달랐다) 선생님은 익숙하게 그곳의 점원들에게 방문 목적을 간단히 설명했고,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눈앞의 것들에 달려들어 한껏 호기심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각자 미리 찾아본 종이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기도 했고, 그것 말고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없는지도 꼼꼼히 살펴봤다. 단체 행동에서 혼자만 시간을 늘어지게 사용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급할 것은 없었다. 초보들의 눈에 보이는 만큼 고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표지에 사용할 종이는 크라프트 계열, 내지는 그와 어울려 보이는 살짝 까끌거리는 종이를 골랐다. (표지는 뉴크라프트보드 205g, 내지는 그린라이트 100g이었다) 이 토요일 수업 전까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문구 코너에서 발견한 연습장에 시선이 갔다. A5 사이즈에, 표지가 크라프트지로 된 심플한 연습장이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내가 만드는 작은 여행책도 이런 연습장 같은 느낌이면 좋겠다 싶었다. 사람들이 보았을 때 누군가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일기처럼 적어놓은 것 같은 작고 따뜻한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 결과물이 의도를 잘 반영하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각자 고른 종이들을 한두 장씩 구매했다. 그곳에서 파는 한 장은 굉장히 컸다. A4 사이즈를 몇 장씩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설레는 마음으로 구매한 종이들을 들고는 다음 스팟으로 이동했다. 건물 뒤편으로 난 작은 골목길을 조금 따라가면 되는 곳이었는데, 종이를 잘라주는 곳이었다. “A5 사이즈로 잘라주세요”라고 하면 기계에 넣어 눈앞에서 바로 잘라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런 몇 장 안 되는 소량 작업을 하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을 것만 같은 기계였다. 하지만 아저씨는 ‘또 왔구나’라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맞이하며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처리해주셨다.
자른 종이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는 처음 모였던 커피숍 옆에 위치한 인쇄소로 향했다. 작은 디지털 인쇄소였는데 이번에는 예상과 달리 문전박대 비슷한 분위기였다. 안그래도 선생님이 처음 설명할 때 이런 인쇄소들에서 자기들이 사용하는 기존 종이 외의 다른 종이들로는 인쇄 작업을 잘 안 한다고 했었고, 그나마 이 인쇄소가 그 작업을 해준다는 것이었는데, 이 인쇄소 역시 다른 인쇄소들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고른 종이들 중에는 일반 인쇄 용지보다 두꺼운 용지들도 있었는데, 그런 종이로 인쇄를 하면 기계에 걸리고 무리가 간다는 것이었다. 매끈하지 않고 까끌거리는 종이를 넣는 것도 반기지 않았다. 우리는 당황하여 선생님을 호출했고 (선생님은 우리가 종이를 고르던 시점에 먼저 커피숍으로 돌아가 있었다) 선생님은 여차저차한 사정을 설명하여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우리는 인쇄소 직원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는 태도를 유지하며 조용하고 빠르게 종이와 출력할 파일들을 건넸다.
그 뒤로는 별 탈 없이 모두 본인이 고른 종이에 준비한 글과 이미지를 출력한 결과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모두 눈이 반짝반짝했다. ‘이런 느낌이었어!’, ‘이런 느낌 아닌데?’ 사이에서 좀 더 자신이 원하는 책의 느낌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들이었다. 다시 커피숍으로 모였을 때는 처음과 달리 수강생들의 말이 더 많아졌다. “이것 괜찮나요?”를 확인 받기 위해 폰트 모양과 크기, 장평과 자간, 한 페이지 내의 분량, 종이의 색감과 질감 등등 쉴 새 없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서먹한 사이였지만 다른 사람들 것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며 괜찮은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 폰트 괜찮은 것 같네요. 전체적으로도 자리가 잘 잡힌 것 같고요” 한 분이 내 인쇄물을 보며 해준 말씀 덕에 마음이 으쓱해졌다. 그 한 마디가 ‘그래, 나쁘지 않아. 이정도면 잘 한 거야’라는 마음으로 귀가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종이, 기계, 인쇄 등을 눈으로 보니 마무리를 짓고 싶은 마음이 더 확고해졌다. 비록 어린 시절 만들던 문집 같은 결과물이 나온다 하더라도 실제 결과물을 보면 진짜 신이 날 것 같았다. 이제 최종적으로 편집을 마무리하고, 인쇄소에 연락해 인쇄와 제본을 맡길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