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수업에 들고 갈 수정 기획안을 써야 했다. (‘글쓰기부터 시작하는 책 쓰기’ 수업을 듣는 중이었다) ‘유럽 배낭여행’같이 뻔한 것 말고 뭔가 기획력이 돋보이는 내용이 필요했다. 사실 ‘기획력이 돋보인다’는 것에 대한 실체부터가 막연하긴 했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학점을 받는 수업도 아니었고,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업무도 아니었다. 다만 자존감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나도 할 줄 아는 게 있어’라는 식의 작고 소중한 자신감 비슷한 것이었다.
한 번 발표하고 나면 사라지고 없어져버릴 ‘출간기획서 과제’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 기획서를 멋지게 쓰고 나면 책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못 쓰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뭐라고 내용을 채워가야 할지 정말 너무 막연했는데, 왠지 이것을 써내지 못하고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또 한 번 ‘능력’을 쌓아야 할 시점에 그러지를 못하고 쉽게 넘겨버리는 짓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종종 게임을 하곤 하는데, 초반에 비해 시간이 지날수록 레벨을 올리기가 무척 어려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전보다 경험치를 어마무지하게 모아야 하거나 어찌하지 못하는 시간을 꼬박 보내야 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물론 레벨을 올리는 방법은 더 다양하다) 노력을 들여야 하는 절대 양이 많아지기 시작하면 슬슬 게임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레벨을 더 올리지 않으면 다음 스테이지를 돌파하기가 쉽지 않아 흥미가 떨어졌고, 레벨을 올리자니 그 행위 자체가 너무 고행 같이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게임조차도 꾸준하고 깊이 있는 노력 없이는 원하는 화려한 플레이를 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봤던 만화 때문이라고 꽤 자주 핑계대곤 했는데, 사실 맥락상 딱 떨어지는 경우도 아니었다. 한 마법 경연대회에서 새로 변해 높이 솟은 장애물을 날아올라 넘어가는 테스트였는데, 주인공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장애물 옆으로 슬슬 걸어 돌아가 다음 지점에 도착하는 장면이었다. 맥락은 주인공이 그 타이밍에 뛰어난 마법 실력을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세상사 아등바등할 것 없이 저렇게 쉬운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작위적인 교훈을 저장하고 말았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쉽게 하자’라는 나름의 불문율은 삶에 꽤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연히 직장 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할만한 레퍼런스를 따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윗분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똑같이 베꼈다는 의미는 아니고,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첫 직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해보았지만 그렇게 효율적인 것 같지 않았다. 특히나 윗분의 의견과 상반될 때는 내 생각을 더 깊이 발전시키는 것이 굉장히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해보아도 결국은 그분의 뜻대로 관철되어야 끝이 난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점점 더 고민에 게을러졌다. 처음 브레인스토밍을 위해서는 적당히 레퍼런스를 찾아본 다음, 미팅을 통해 그분께서 꺼낸 의견에 맞춰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면 그나마 가장 짧은 시간에 일을 끝마치고 집에 갈 수 있었다. 어차피 똑같은 월급 받는 것, 집에 되도록 일찍 가고 개인 시간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 훨씬 더 똑똑하게 사는 방법이라 생각하게 됐다.
이 현명하고 사리에 밝은 (직장)생활 태도가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것도 이렇게 사소한 개인 취미를 위한 수업 과제에서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다. ‘출간기획서’를 작성해보기 위해 문서 파일을 열었는데, 그럴 수 없이 막연했다. 순간 ‘왜 이렇게까지 막연해하지? 그냥 쓰면 되는데?’라고 생각하다가, 아무도 업무 지시를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름이 끼쳤다. 그랬다. 어떻게 하라는 지시 내용이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생각하고 찾아서 만들어야 했다. 이게 맞다, 저게 맞다 판단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쓰는 것이 좋은지 안 좋은지도 모른 채 써야 했다. 더군다나 내가 쓴 것은 거의 다 안 좋은 것이라고 판정 받았으니 스스로 알아서 쓰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회를 읽을 줄 모르는 능력 없는 기획자였으니, 내 소견에 옳은 대로 기획안을 작성하는 것은 시간만 버리는 쓸데없는 일이었다.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눈물이 나려고도 했다. ‘이렇게까지 무능하다고..?’ ‘그래도 회사에서 고문관 정도는 아니었는데.. 한 사람 몫은 하고 있었는데.. 이게 이렇게나 못할 일이라고..?’ ‘역시 난 기획안을 쓸 줄 모르는 기획자였던건가..?’ 그야말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과제를 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몰랐다. 절망적이기도 했다.
다음 수업부터 가지 말까 생각했다. 과제도 못하겠는데 가서 뭐하나 싶었다. 아직 여섯 번이 남았지만 그것 안 듣는다고 삶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나 좋자고 내 돈 내고 듣는 건데, 이렇게 괴로울 일이라면 안 하면 그만 아닌가. 아직 두 번밖에 안 들었으니 남은 기간에 대한 것만큼 환불도 가능하지 않을까. 돈도 못 벌고 있는데 그거라도 받아서 집 밖에 나갈 때 차비에라도 보태는 것이 낫지 않을까. 괜찮으면 캔 커피도 하나 사 먹고. 그래, 음료 정도는 마시고 다녀야지, 그마저도 못하면 너무 우울하지 않겠나. 사람이 소소하게나마 좋아하는 것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돈 못 번다고 그것마저 못하면 너무 서글프지 않겠나.’ 기가 막히게 생각들이 이어졌다. 아주 그럴듯해 보였고, 그리 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전화번호를 찾아 환불 신청을 진행할 기세였다.
사이트에 들어가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휴대폰을 드는데 멈칫 했다. 한숨도 한 번 나왔다. ‘정말 그래서 안 한다고?’ 이번에는 한심했다. 절망적인 것보다 기분이 더 나쁜 것도 같았다. 진짜 아예 손도 못 댈 정도로 힘든 일인건가 싶은 생각이 다시 시작됐다. ‘당장 100m를 10초에 달리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1분 안에만 달리면 된다고 한다면 해볼 만한 것 아닐까? 아무리 살이 쪘다 한들 60초 안에는 통과할 수 있겠지. 에이, 설마. 만약 당장 안 된다 해도 그건 좀 뛰어보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이 과제도 다음주에 당장 A급 기획안을 가져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상하면 한 번 더 창피 당하고, 한 번 더 하면 되지. 하아, 그래도 창피 당하는 건 싫은데. 그래도...’ 이런 식이었다. 그닥 논리적이지도 않았고, 누가 들어도 납득될 만하게 전개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왠지 이번에도 정면승부를 하지 않고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한 번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땀이 나기 직전까지만 몸을 풀다가 마는 것 말고, 좀 요령 없어 보인다 해도 땀내가 날 때까지 움직여보는 것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정말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액체괴물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애니메이션 <월-E>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비대해진 채 앉아서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적당한 근육은 필요했다. 걷기도 하고 가끔을 뛸 수도 있는 근육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