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쓰기 수업에서 출간기획서 과제로 자존감이 하락한 뒤 어쩌다 이렇게 한심한 인간이 됐는지 인생을 또 돌아보는 것까지 며칠을 우울하게 보냈다. 당장 내일모레로 다가온 세 번째 수업을 갈까 말까부터 이놈의 인생을 어디서부터 다잡아야 할지 등을 놓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고, 아내 눈치도 봐야 했다. 코로나 시기가 아니었어도 마음껏 떠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냥 이 자리에서 다시 힘을 내야 했다.
‘힘을 내야 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힘이 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힘을 못 낼 것도 없다. 어느 정도 적정선까지 우울함의 시간을 채웠다면 반대쪽으로 기울일 수 있다. 말도 안 되게 심각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비슷한 종류의 감정으로만 몇날 며칠을 보내면 조금 지겹기도 하다. 시원한 바람에 기분을 바꿔보고 싶기도 하다. 죽을 것 아니면 다시 살아갈 힘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정신을 차릴 때가 됐다. 살아갈 날이 아직 말도 안 되게 많이 남았다.
서점에 갔다. 어렸을 때부터 대형 서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딱히 책을 정성껏 찾아보지도 않았다. 어떨 때는 그냥 스윽 한 바퀴 걷고만 나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종종 서점을 가고 싶었다. 그냥 서점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책보다 문구류 코너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출간기획서 과제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니 서점에 갈 핑계로는 충분했다. 마음의 안식처 같은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다른 때보다는 열심히 이 책 저 책을 살펴보다가 깨달았다. ‘뭐라도 한 사람이 책을 내는 것’이라는 것을.
뭘 했는지 돌아보기 시작했다. 우울하게 삶을 돌아보는 것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여전히 암울한 마음을 완전히 걷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 것이었으니 약간 기운이 달라지긴 했다. 어쩌다 책 내는 것이 로망이 되었는지도 생각해보고, 언제부터 글 쓰는 것이 좋았는지도 생각해봤다. 남들과 다르게 살아온 부분이 있었는지도 생각해보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 할 수 있는 얘기가 무엇인지도 생각해봤다.
영화 같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BGM이 흘러나오면서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드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깐잠깐 종이에 몇 글자씩 끄적였고, 대부분의 순간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직장생활을 잘게 잘게 끊어서 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는데, 딱히 구조화할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 말고는 인생에서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 여행은 이미 퇴짜를 맞은 아이템이었으니 또 들고 갈 수는 없었다.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독립출판으로 책 한 권 만들어본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분량이 충분할 것 같지 않으니 더 살을 붙일만한 것이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일단은 출간기획서 과제를 해내기로 한 것이었다. 서점을 오가며 책 쓰기 수업은 끝까지 나가자고 마음먹었었고, 다음 수업을 가려니 과제를 해야 했다. (인생을 다잡는 것은 그 다음에 하기로 했다) 출간기획서에는 책의 제목과 내용 소개, 목차 등을 채워 넣어야 했다. ‘독립출판 경험기’만으로는 목차를 충분히 만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일반적인 책 출간을 위해서는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600~800매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고, 에세이 책을 내기 위해서는 30~50개 정도의 목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목차라는 것을 만들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필요한 분량이 나올 만한 내용을 하나의 꼭지로 잡아야 했는데, 목차를 잡으면서도 그만큼을 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 그 목차대로 정말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어쨌거나 목차가 책의 뼈대가 된다고 했으니 적어도 30개 정도의 목차를 만들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찾아내야 했다.
독립출판 수업을 들으며 여행책 만든 것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왜 책을 내고 싶어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봤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글쓰기라는 행태가 언제부터 내게 이렇게 중요한 것이 되었는지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목차 형태로 적어보니 얼추 될 것 같았다. 이거라면 30개 가까운 꼭지를 잡은 뒤에 실제로 글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식으로 출판사와 계약해서 책을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책을 내는 것이 로망인 사람이 소소하게나마 노력해온 과정들을 엮어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그 노력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별 거 없었지만 ‘요만큼이라도 써보기는 했어요’라는 식으로라도 기록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600매 정도의 분량을 다 채웠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도전 자체가 주는 유익에 대해서라도 써보자는 마음이었다.
사실은 그것 말고는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인생을 돌아보며 귀하게 발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그것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 수준에서는 그것밖에 안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하여간에 그거 하나였다. 이 반백수 시간에 뭐라도 하려면, 특히나 글을 쓰는 행위에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면 이거라도 써야 했다. 약간은 절박한 심정으로 출간기획서 과제를 작성해 나갔다. 이것도 퇴짜 맞으면 더 이상은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없는데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다. 소중하게 한 문장 한 문장을 만들어 이어 붙이고는 몇 번을 읽고 또 읽으면서 조심조심 수정을 가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수정한 과제를 발표했다. 선생님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으나 지난번만큼은 아니었다. ‘책으로 출간하기는 어려워도 브런치에 연재할 수는 있겠다’는 최종 평가를 받았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다행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인데다가 뚜렷한 결과물도 없는 내용이니 책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의 나로서는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얘기이니 이것만이라도 놓치지 말고 해보자는 심정이었는데, 글을 올릴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수업을 같이 듣던 한 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괜찮은 내용인 것 같다며 격려를 해주시기도 했다. 감사했다.
일주일 가까이 힘들었던 마음은 어느 정도 풀려 있었다. 결국 출간기획서 과제도 다시 했고, 수정본이 지난번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얘기도 들었다. 다시 과제를 하는 과정에서 기운을 내기도 했다. ‘그래, 할 수 있는 얘기부터 하자’, ‘당장 엄청난 책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기본적인 글쓰기를 꾸준하게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해보자’ 같은 식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꽤 긴 분량의 글을 처음으로 써나가는 동안 스스로에게 괜찮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