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근길 독서일기 15.
테오도어 W. 아도르노 <신극우주의의 양상>
1967년 4월 아도르노는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학생연합의 제안으로 빈 대학에서 강연을 한다. 1964년 서독에서 극우주의 정당 독일 민족민주당이 창당해 지방 선거에서 약진하면서 극우주의의 부활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던 때다. 이 강연 녹음은 언론인 폴커 바이스의 해제가 붙어 2019년 7월에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52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간극이 무색하게 아도르노의 통찰이 현재까지 유효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강연록이다. 불과 100페이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짧지만 올여름에 읽었던 책 가운데서 가장 유익했다고 꼽을 만하다.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에서였던가, 파시즘이 새로이 도래한다면 하겐크로이츠와 가죽장화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극우라고 하면 단순히 나치 비슷한 것, 더 널리 봐서는 국민의 힘이나 일베 같은 것을 떠올린다. 아도르노는 정치학자라기보다는 철학과 미학을 아우르는 사상가이고, 연구가 아닌 강연을 위해 쓴 글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극우주의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탐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극우주의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한 발 더 나아가는 통찰을 보여준다. 극우주의란 무엇이며 어떤 배경에서 태동하는가?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의 집적 경향은, 자신이 전적으로 부르주아라는 계급적 자의식을 지니고 있고 또 자신의 계급적 특권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함과 동시에 가급적 강화하려는 여러 계층들이 영구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늘 잠재해있는 계급 하락의 책임을 그 원인이 되는 장치에 묻는 대신, 자신들이 한때 지위를 누렸던 체제를 비판적으로 적대해왔던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
쉽게 말해, 돈이 돈을 버는 속성을 지닌 자본주의는 그 풍요로움을 소수의 손에 집중하게 되며, 그 풍요로움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일종의 박탈이 생겨나게 된다. 또 돈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은 연쇄적으로 욕망을 자극하여 스스로를 확장하지만, 욕망은 한정이 없을지라도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에 위기가 생겨난다. 이로써 경제에 대한 불안감과 계급 하락에 대한 위기감의 원인을 찾게 되는데, 그 원인에 대한 책임을 다른 세력, 다른 인종,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갖고 자신과 다르다고 믿는 사람들에 대해 그 분노와 증오를 투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와 증오는 위기감이 고조될수록 극단화된다. 여기까지가 극우 세력이 확장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배경이다.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은 자주 그렇듯이 객관적인 상황에 의해서 더 이상 그 실체를 유지하지 못할 때 비로소 자신의 악마적인 성격을, 자신의 진정으로 파괴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지요." (13)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다. 위기는 극단적인 사고를 촉진한다. 아도르노는 역사적 실례로 마녀사냥은 스콜라 철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가 아니라 종교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나려고 할 때, 시작되었음을 들고 있다. 히틀러의 나치도 1차 대전으로 인한 박탈감과 경제 위기 속에서 집권했다. 아도르노는 극우주의의 발현이 민주주의 체제의 특유하면서도 매우 일탈적인 현상이라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부류가 관찰된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그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까지 어떤 곳에서도 정말로 완전히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만 존재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라고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파시즘 운동을 스스로의 개념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제대로 부합하지 못하는 민주주의의 상처이자 흉터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 (18)
그렇다면 극우주의는 어떻게 힘을 얻을까? 이 책에 따르면 합리적 수단과 비합리적인 목적이 결합할 때다. 유튜브와 같은 새로운 매체가 기존 매체의 대안으로 떠오를 때, IT가 주는 진보적인 이미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식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이 보다 증진되고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이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있었다. 하지만 극우 유튜브와 가짜 뉴스가 횡행에서처럼 사람들의 확증 편향을 강화해 정치의 극단화를 초래하고 있다. 오히려 가짜 뉴스와 같은 선전선동들이 아무런 여과와 제제 없이 급속히 유통될 수 있는 통로가 열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메시지들이 유포되면서 의회제 정치의 지리멸렬함을 타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인식된다. 여기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의회정치와 극우주의의 관계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의회정치는 극우 정치, 더 나아가 파시즘의 출현의 선결조건이다. 파시즘이란 의회정치의 지리한 난맥상을 일거에 돌파하려는 의지의 정치, 완력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은 의회제를 맹신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SNL에서 인기를 끌었던 "The Rock Obama" 같은 스킷을 보면 법안 통과를 방해하는 상원의원들 때문에 분노한 오바마 대통령인 또 다른 페르소나인 더 락 오바마로 변해 의원들을 창밖으로 내던진다.)
"프로파간다는 과거 나치에게 그랬듯이, 바로 사태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수단이 점차 목적을 대체하게 된다고 할 때, 이러한 극우주의 운동들에서 프로파간다는 그 자체가 정치의 실체를 이룬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23)
아도르노는 극우 프로파간다의 본질이 합리적 목적과 비합리적 수단의 결합이라고 해놓고 이 대목에서는 수단과 목적의 전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하게 쓴 글이 아니고 중요한 개념만 염두에 두고 한 강연이므로 논지의 일관성은 떨어지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극우 이데올로기란 자기 보존의 본능에 의한 일관성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외려 이런 혼동이 극우의 본질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아스팔트 우파'라는 명칭이 자주 사용된다. 아스팔트 우파들은 제도권 정치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제도권 정치의 비뚤어진 소산이며 옛날 관제 동원의 유물이다. 이들은 국가를 추앙하면서도 불신한다. 주옥순 대표가 코로나 방역에 실패한 정부의 책임을 묻다가 치료를 받고서는 건보 정책을 찬양한 웃지 못할 일화를 보면서(한국의 보리스 존슨인가), 나는 한국 극우세력의 두드러지는 특질은 '지위 유지와 이해득실에 대한 매몰'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대의보다는 당리당략과 권모술수를 신봉하고 선거나 관계와의 결탁을 통한 이권 추구, 지배세력에 대한 결사옹위에서 떨어지는 구전 따먹기 식의 사리사욕 추구가 한국 극우의 본질 아닐까? 이들은 매우 모순적인 존재들이다. 대중성을 끊임없이 표방함과 동시에, 대중에 대한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이 기준은 결국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 테두리에 머무르는 사람은 의식 있는 선각 지사이고, 그 밖에는 우중이라는 말초적인 정치감각. (유감스럽게도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인격적인 지도자로 현직 대통령을 추앙하는 소위 진보세력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대중은 곧 우중이므로 '고귀한 거짓말'을 통해서 교화할 수 있다고 보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정당화된다. 역설적으로 이런 프로파간다는 아도르노가 "누군가 자신보다 영리하면 그는 그렇게 궤변가가 된다." (34)는 폴 발레리의 말을 인용했듯이, 대중과 지식의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필연적인 부산물로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띤다. 그래서 기존 언론, 기존 학자, 기존 담론은 믿을 것이 못되며 '우리'의 말에 기울이도록 계속해서 종용하는 것이다.
"파시즘에 정말로 짜임새 있는 이론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운동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권력, 무개념적 실천, 그리고 특히 무조건적인 지배이고, 이에 비해 이론에 녹아들어 있는 정신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늘 암시되어 있습니다." (40)
상기한 문장은 일견 일리가 있는 듯 보이면서도 아도르노의 한계인 관념성과 추상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문장이라고 본다. 강연문에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지는 몰라도, 그리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아도르노 정도의 사상가라면 이것이 왜 그런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부기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강연문에서 '파시즘'과 '극우주의'는 별다른 구분 없이 사용되는데, 이는 부차적인 문제다. 정치학 전공자나 연구자는 아니기 때문에 어폐가 있을 수는 있겠고 단상 수준에 머무르는 생각이지만, 나는 극우주의가 파시즘을 포괄하는 광의의 정치학적 맥락임을 인정하면서, 또한 일반의지가 하나의 인격체로 양도될 때, 극우주의에서 파시즘으로의 이행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별도로 정치학을 배운 사람도 아니고 그저 일개 (그것도 반쪽짜리의) 저널리스트로서 현장에서 얻은 영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극우주의는 어디까지나 서구식 사고의 산물이기 때문에 한국적 특수성을 파악하기 어려울뿐더러, 민족적, 인종적, 문화적 우월감에 기반한 서구의 극우주의와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전통사회와 근대사회가 급격하게 대치된 한국사회라는 배경에서 등장한 한국의 극우주의는 양상이 다르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 정치를 두고 모든 인력과 자원을 중앙에서 빨아들이는 소용돌이로 묘사했다. 중앙 정치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옛날에는 과거 시험이라는 하나의 길이 있었다면,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복수의 경로가 생겨난다. 이른바 고시를 패스해 판검사, 관료가 되어서 정계로 진출하는 방식, 변호사나 기자, 앵커처럼 언론을 이용하는 방식, 보좌관으로 출발해 도제식으로 기성 정치인으로부터 전수받는 방식, 재력을 쌓거나 타고난 재력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방식, 또 비교적 근래에 출현한, 시민사회에서 소위 '진보 스펙'을 쌓아 기존 정당으로부터 스카우트되는 방식 등. 분단 대치 상황에서 국가로의 자원 동원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각종 관개수로들이 다시 봉건제적 방식으로 전유되어 다이묘의 교토 입성과 같은 출세의 가도가 형성된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이런 공적 가도에서 탈락함으로써 기성 정치에 대한 정념과 원한을 품은 정치 낭인들이 형성된다. 지배 세력과 지배 세력을 대변하는 정당들은 이 정치 낭인층을 흡수해 '직함'과 '이권'으로 기존의 정치적 해법이 먹히지 않는 분야에서 '더러운 손'으로 활용되며, 이들은 충성도와 효용에 따라 중용되거나 버려진다. 바이마르 공화국 하의 나치 돌격대와 한국 극우의 유사점이 있다면 이런 정치 낭인들, 정치가 지망생들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제도권에 이미 탄탄한 세력 구성이 완비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비슷하다. (DJ가 집권하면서 '(타칭) 공산주의자'에 나라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군사 정권 시절과 같은 물리적 개입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정치적 무력감 때문에 군사정권 때보다 한층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
"극우주의는 그것의 고유한 실체가 사실과 다른 거짓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인, 이 경우에는 프로파간다적인 수단들을 동원하게 됩니다." (53) "진리를 비진리에 봉사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그 자체로는 참되거나 올바른 관찰들을 그것이 속한 맥락에서 떼어내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38)
극우주의의 본질이 비합리적 목적과 합리적 수단의 결합이라면, 이 결합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프로파간다, 즉 선동이다. 선동의 정치는 또한 완력의 정치의 선결조건이다.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리 세력을 모아야 하고 소위 '단도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우세력들이 사회에 플러스가 되는 정책, 그러니까 생산적인 정책이 아닌 파괴적인 정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다. 극우세력이라고 해서 육신이 둘이 아니며, 코로나에 걸리면 죽거나 힘들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마스크도 쓰지 않고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집권하는 자유주의 세력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힘의 균형을 다시 자기네들에게 끌어오기 위함이 아닌가? 극우주의 선동의 특징이 일관성의 결여, 더 나아가 앞서도 얘기했듯이 자기 보존 본능의 의한 일관성의 파괴라면 이 선동은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모습을 바꾸고 끊임없이 나타난다. 속칭 '가짜 뉴스'로 드러나는 선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상대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거짓 정보를 참된 맥락 속에 교묘하게 위치 짓는 행위다. 그리고 이런 선동들이 일관성이 결여된 이유는 어떤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적의 주장을 분쇄하기 위해 변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극우 정치는 꽤나 모순의 정치라고 표현할 만하다. 지성을 동원하되, 그 지성으로써 반지성주의적인 본질을 가려한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기에 가짜 뉴스는 진실로만 맞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도르노는 실제적인 맥락에서 그 답지 않은 구체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
"이런 증후군의 본질적인 내용 중 하나가 이 권위주의적 성격의 사람들이 대화를 붙일 수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 즉 어떤 교감도 원치 않는 자들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2)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문제를 윤리적 호소, 인간성에 대한 호소로써 접근하면 안 됩니다. '인간성'이라는 말 자체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인간들을 분노로 들끓게 하니까요. 그 말은 마치 두려움이나 연약함의 표명처럼 들립니다....(중략).... 정말로 가망이 있어 보이는 유일한 조치는 극우주의의 잠재적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책임져야 할 결과에 대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중략).... 프로파간다가 끌어들이려 하는 자들의 철저한 이해관계를 환기시켜야 합니다." (28,29)
현실정치의 교착에서 오는 피로감이 극우주의를 부채질한다면, 우리는 현실정치의 파괴가 아닌 현실정치의 현실이 다른 형태의 현실로 전화함으로써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명목상의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에 현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현실화'로서, 그래서 정치가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면서 이런 반정치의 정치가 구축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아도르노는 책에서 문제 설정을 했을 뿐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일개 독자인 나로서도 그 해답은 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우주의라는 현대 정치가 낳은 괴물과 싸울 때,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심금을 울린다. 왜냐하면 그 조언들은 괴롭지만 방기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영영 교화될 수 없는' 부류가 있다는 식으로, 표현은 다를지라도 유사한 자기 위안의 문구들을 꺼내 들면서, 모든 민주주의에는 아무리 애써도 제거하기 어려운 교화될 수 없는 자들이나 멍청이들, 혹은 미국에서 부르듯이 광신적 과격파가 있다는 주장을 매우 자주 듣곤 합니다. 그런 주장에는 모종의 체념 어린, 부르주아적인 자기 위안이 들어 있습니다." (17) "극우주의를 처음부터 마치 자연재해처럼 바라보는, 마치 돌풍이나 기상재해인 양 예보를 하는 이런 사고방식에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을 차단해버리는 일종의 체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현실과 맺는 나쁜 구경꾼 같은 관계가 들어 있습니다. 극우주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계속될지에 대한 책임은 종국적으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