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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Nov 05. 2020

프롤로그

심야괴담회 제작일지

2021년 1월 초순 론칭을 목표로 <심야괴담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새 본부장이 들어오면서 파일럿 프로그램 기획안을 공모하여 젊은 피디들과 팀장급 피디 간의 이중 심사를 통해 가장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기획안에 대해 제작 기회를 부여한다고 발표했었다. <PD수첩>을 나오면서 준비한 기획안 두 개를 제출했다. 첫 번째는 범죄 다큐 기획안, 두 번째는 심야 괴담회. 평피디들이 모여 선정한 기획안 심사에서 범죄 다큐가 1위, 심야괴담회가 2위, 그러나 본부장과 CP(팀장급 피디)들의 심사에서는 범죄 다큐가 기존에 진행되고 있던 <콜드 케이스>와 같은 장르라는 이유에서 보류되었고, <심야괴담회>가 포맷은 다르지만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와 같은 공포 프로그램의 전통도 있는 만큼, 그리고 같은 주제를 토크쇼로 표현한다는 참신함을 인정받아 하반기 제작에 돌입하기로 결정 났다. 기획안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예산을 부여받으려 할 때는 부동산 교양 예능 <돈벌래>가 제작 중이었고, 이 프로그램이 <돈벌래> 론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후속 프로그램으로 출범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가 프롤로그이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요즘 일본 영화감독 니시카와 미와의 <고독한 직업>을 매우 인상 깊게 읽고 있기 때문이다. 글에는 세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너무 읽기 싫게 쓴 글. 둘째는 굉장히 잘 쓴 글. 셋째는 내 경험과 끊임없이 접점을 모색하면서 내게 쓰려는 충동을 부여하는 글.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글은 셋째 범주에 든다. "너도 한 번 써보지 않을래?"라며 끊임없이 회유하고 유혹하는 글. 그리고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은 만큼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경험들을 허공으로 날리기는 싫었다. 새 프로그램 제작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몸은 하나인데, 일은 세 갈래, 네 갈래로 거열형에 처한 죄인처럼 육신과 정신이 너덜거리기 시작한다. 일은 비누거품과 같아 건드릴수록 새끼를 치듯 늘어난다. 잠잘 시간도 부족하고 쉴 시간은 더더욱 부족하다. 결국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출근 후 잠깐, 점심시간 잠깐이다. 퇴고는 사치다. 하지만 쓰고 싶다. 


여의도 시절, 밤 10시, 11시쯤 일이 끝나면 "오늘은 일찍 끝났다. 집에 가서 뭐라도 할 수 있겠지." 기쁜 마음으로 퇴근을 준비할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뭐하니? 공작 상가다. 빨리 와라." 선배들의 회식에 끌려다니면서 듣기 싫은 소리 듣고 나면 새벽 1시, "아 이것이 피디의 인생인가, 이렇게 살기는 싫다. 이대로 살면 뭐가 되겠나?" 분한 마음에 얼음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1시간이라도 더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었다. 기획안이 뽑혔을 때, 뭔가 이런 노력을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쓰모토 세이초 문장이 하나 있다. "나는 노력만큼은 해왔다."  노력에 대한 자부심과 의지가 담겨 있는 문장이다. 그리고 세이초는 이 문장을 인생 속에서 실현했다. 나도 이 기획안이 당선되고 나서 이 문장을 속으로 되새겼다. 노력만큼은 해왔다. 이제부터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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