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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Nov 09. 2020

심야괴담회는 어떤 프로그램인가.

심야괴담회 제작일지 2.

<심야괴담회>는 어떤 프로그램인가? 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나는 당연히 교양 프로그램이라고 답한다. 더 나아가 문학, 문예 프로그램이고 더 엄밀히 말하면 스토리텔링 챌린지 프로그램이자, 전 국민 문예부흥 프로젝트라고 덧붙인다. 그러면 어떻게 이 프로그램의 기획안이 (긍정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MBC 교양에서 통과되었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그만큼 교양 내부에서 일어나는 절박한 변화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함이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교양 PD 치고 잘 만든 교양 프로그램에 대한 동경이 없을 리 없다. 다만 교양이라는 주제에 과도하게 천착하면 시청률은 포기한 채 자기만족적인 프로그램에 머물기 마련이다. 나는 '교양'이라는 대의는 어느 정도 선에서 만족했으니, 그다음에는 재미를 추구하고 싶다고 느꼈다. 문예 프로그램의 성격을 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최초 기획의 지향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심야괴담회>는 문예 프로그램인가?


사람들에게 시나 소설을 써보라고 하면 필경 당혹해할 것이다. 아니, 짧은 산문이라도 A4 1장 정도로 써 달라고 하면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조차도 숨이 턱 막히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귀신 본 얘기를 들려달라거나 귀신 본 썰을 게시판에 풀어달라고 하면 지독한 실재론자를 빼고는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두 마디씩 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들은 귀신 본 썰뿐만이 아니라, 황당한 연애 경험, 이상한 것을 마주친 이야기, 군대 얘기 등 각종 게시판에서 유형화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유형의 얘기들이 방송의 소재로 이미 활용된 상태였다. 그러면 왜 괴담인가? 일본의 괴기 소설가 교고쿠 나쓰히코는 '괴담은 이야기의 왕도'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이 괴담의 의의를 제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희로애락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방송에서 다룬 적이 없었다. 교양 치고 너무 높은 시청률이 나와 제작진이 노심초사했다는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가 먼저 있었지만, 재연이라는 2차 가공을 거친 프로그램으로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괴담이 짤막하면서도 완결성을 지닐 수 있고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기에 좋은 소재이며, 일단 "야 다 모여봐, 내가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줄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믿어왔다.


또 괴담을 향한 나의 강렬한 애착도 있었다. <다이나믹 콩콩 코믹스>, <유령 대백과>, < 괴기 랜드>, <세계의 요정 100가지 이야기> 등을 성배로 여기던 어린 시절을 지나 군대에서 피로에 의한 환각인지, 신비한 체험을 조금 했지만, <불만제로>, <PD수첩> 같은 하드보일드 프로그램들을 거치면서 괴담에 대한 사랑은 잊고 있었다. 다시 괴담에 대해 눈길을 주기 시작한 시기는 파업의 여파로 TV 전파를 송출하는 주조정실의 철야 근무에 배속되면서부터다. 낮에는 꼴 보기 싫으니 밤에나 나오라는 경영진의 배려였다. 밤을 새우면서 '밤에 깨어있는 이는 귀신과 창녀'라는 김승옥이었던가, 어느 문학가의 시대착오적인 문구가 떠올랐고, 잠에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깨어서 무엇을 할 수도 없는 지경에서 기나긴 밤을 어찌할 수 없어 온갖 괴담 게시판을 떠돌았다. 애국가가 끝나고 애국가가 시작하는 사이, 한 시간 정도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 때, 선연하게 떠오르는 괴담의 광경들. 어떻게 사람이 활자 몇 개로 사람을 질리게 만들 수 있는가. 세계의 내로라하는 문학가와 문학자들도 풀 수 없었던 이야기라는 요술이 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언젠가 제작으로 돌아가면 이 소재로 방송을 만들어보고 싶다. 재연은 고루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대의조차 무색해지니까 제작비도 줄일 겸, 스튜디오에서 만들어 보자.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안 듣는 풍토,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다울 수 없는 삭막한 사회에서 차라리 괴이한 이야기라도 말을 걸어보자. 이런 가벼운 의도로 시작해서 이제 점점 의도가 형체를 띠기 시작했다.


"선배, 파일럿 가면 엄청 스트레스받고 쓰러질 걸요?"하고 후배가 겁을 주었지만, 스트레스는 있어도 쓰러질 정도는 아니며, 날이 밝을 때마다 '아, 오늘은 봉고차를 타고 어디를 떠돌아야 하는가'에서 '얼른 나가서 이거 해치워야 하는데'가 아침의 구호로 자리 잡고 있다. 스태프들에게는 "평범하고 볼만하게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느니, 미친놈처럼 이상하게 만들었다."는 말을 듣자고 얘기해두었다. 이 기획은 약점이 없지 않다. 공포와 괴기라는 소재가 보편성을 띤 이야기는 아니며, 더군다나 TV에서 3분 내지는 4분 동안 남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어떻게 참고 듣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작가님들에게는 기획안에 단점이 많지만 단점은 버리고 장점에 집중하자고 말씀드렸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단점에  프로그램의 성패가 달려있다. 앞으로 남은 두 달, 이 단점을 어떻게 극복하게 될지는 나도 궁금하다. 요즘은 자신감도 차오르고 스트레스도 별로 없어서 아, 내가 피디로서 경지에 올랐구나, 하고 잠시 자신만만했지만 이 자신감의 근원이 내 뒤를 탄탄히 받쳐주고 이끌어주는 사람들 덕분임을 깨닫게 되자, 어깨 위가 묵직해진다. 조연출과 여러 작가님들, 하나라도 더 도움을 주려는 동료, 선후배들, 심지어 공포가 너무 좋아 휴가도 취소하고 합류하신 미술감독님까지. 외로이 괴담을 읽던 밤은 여러 사람이 괴담들을 윤독하는 밤이 되었고, 밤을 지배하던 고뇌와 불안은 프로그램에 대한 열의로 불타오르고 있다.  프로그램이 안 되고 실패하면 어떤가. 뭐가 좀 잘못되면 또 어떤가. 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열정들이 내 마음속의 영원한 불꽃으로 남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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