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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Dec 07. 2020

공개처형의 기억

심야괴담회 제작일지 3.

불운한 PD라는 자기 인식이 강했던 때가 한동안 있었다. 수습도 떼기 전에 아프리카 출장을 받아 들고, 다른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뭔가 새로운 것들을 배워갈 때,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1년을 보냈다. 이듬해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이상한 PD에게서 이상한 연출을 배웠다. 조연출 3년 반의 시간 동안 2년이 없어졌다.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들이 몸과 마음을 묶었다.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못 되겠다. 운 좋게 회사에 들어왔지만, 쓸데없이 운이 좋았기 때문에 더 좋은 사람을 밀어냈다는 생각.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데, 재능이 없는 사람이 과욕을 부려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주어진 재능에 비해 쓸데없이 자존심은 강했고, 선배들이 해주는 좋은 말들도 부질없이 여겨지던 때였다. 친목을 다진다며 족구와 술판을 벌이는 워크숍은 혐오스러웠고, 입사 연도에 따른 사번 순으로 층층시하를 이루는 위계질서는 숨이 막혔다. 결국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 도피뿐. 시간이 나면 책 속으로, 게임 속으로 달아났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 일은 산더미 같았고 퇴근 후의 여유는 사치였다. 퇴근할 때는 연출 선배의 눈치를 봐야 하고, 퇴근을 해도 회식에 붙들려오기 일쑤였다. 회식이라는 미명 하에 주사와 한담으로 시간을 잡아먹고 또 그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가운데, 분노와 회의만 늘었다. 왜 내가 내 시간을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없나? 왜 쓸데없는 행위들을 반복해야 하나? 내가 이런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슈테판 츠바이크는 '한 인간의 운명을 놓고 볼 때, 가장 창조적인 나이에 필생의 과제를 발견하는 것만큼 큰 행운은 없다"라고 썼다. 나는 이 직업이 천직임을 뒤늦게 알았다. 파업을 하고, 노조 탈퇴를 거부한 대가로 쫓겨나서 오피스텔 사무실에서 면벽수도를 하면서, '다음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면, 노동법이 개악되고 쉬운 해고가 가능해진다. 그러면 능력에 관계없이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해고의 척도가 될 것'이라는 흉흉한 얘기들의 압박을 받으면서, 그리고 '너희를 동아투위처럼 만들어주겠다'며 회사 간부들이 협박을 일삼는 가운데서 야 내가 이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회사에서 쫓겨난다면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가산을 정리해서 시골로 내려가면 농사라도 지을 수 있을까? 다른 일을 시작하기에는 나이도 적지 않고, 배운 기술조차 없었다. PD들이 기술 스태프들에게 핍박받을 때마다 "사람은 역시 '기술'을 배워야 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현실화된 것이다. 새누리당이 나날이 개가를 올리고 총선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네 PD 인생은 끝났다'는 소리가 가슴 한가운데 무겁게 자리 잡았다. 이제 피디질 못하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 되었구나. 하려 해도 할 수가 없게 되었구나, 제작을 못하게 될수록 제작에 대한 애정이 오히려 샘솟기 시작했다. 3일 밤을 새우고 주조정실에 완제 테이프를 건네던 기억, 자정 넘어서 어느 제과점 뒤편에서 선배와 쓰레기통을 뒤지던 기억, 내가 살아있다고 느꼈던 순간이 그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피디질'이라는 필생의 과제를 발견했던 때가 바로 이 엄혹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전에 흐릿한 기억으로 제작의 희열이 윤곽을 잡아나가던 때가 있었다. 


장기 파업 초기의 집행부는 종편을 태동시키고 특혜를 주려는 당국의 움직임에 맞서 투쟁을 조직했다. 몇몇 노조원이 국회 담을 뛰어넘다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했던 소위 '미디어법 투쟁.' 당시 집행부는 선전전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각종 동영상 선전전을 준비했다. 노조 간부들이 대부분 교양 PD와 기자들이었기에 제작의 몫은 대부분 연차가 낮은 교양 PD들에게 돌아갔다. 나는 이 점이 심히 못마땅했다. 밖에서는 돈 주고도 보지 못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는데, 말로는 교양 PD들이 투쟁의 주력이라고 해놓고 실제 투쟁의 현장에서는 유리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말이 되나. 집회가 끝나면 집으로, 당구장으로 흩어지는 동기와 선배들을 보면서 느끼는 박탈감 때문에 두 배로 힘들었다. 노조에서 시키는 일도 싫고 이명박은 더 싫은 상황에서 그저 편집의 경험을 유지한다는 명목을 위안 삼자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조금 더 연차가 높아서 후배들을 동원하고 일을 할당해야 하는 PD는 세 배로 힘들어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장점이라고는 편집을 할 수 있다는 시혜 아닌 시혜. 시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동영상 투쟁은 편집의 경험을 유지시켜주면서, 투쟁 상황을 PD 나름의 자유로운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또 당시의 투쟁 경험을 공유하고 편집실에 갇혀 있는 PD들이 조합원들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간접적이나마 드러내 줄 수 있은 통로이기도 했다. 


틀에 박힌 형식을 넘어서서 제작자의 주관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은 제작자에게는 정말로 유용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에 와서 내놓은 좋은 해몽이지만 당시는 끔찍하게 싫었던 기억만 난다. 동영상 투쟁이 개시되었고 낮은 연차별로 동영상 조의 라인업이 나왔다. 기어이 사번을 타고 순식간에 내 차례가 돌아왔다. 역시나 자신감은 없었다. 이렇게 망신만 당하는구나. 싫은 마음을 억누르며 아이디어를 냈고, 콘티를 짜고, 커피 한잔을 쏟아부은 뒤 그대로 붙였다. 편집본은 그다음 날 집회 때 대형 스크린에 걸려 전 조합원 앞에서 상영된다. 당시 내가 '인민재판' 내지는 '공개 처형'이라고 불렀던 것들. 시청자들의 반응이 다음날 보도나 시청률로 반영되는 방식은 차라리 신사적이다. 이 공개 처형식은 반응이 즉각적이기 때문에 더 부담이 크다. 날이 가면 갈수록 PD들의 동영상이 칼을 맞은 검투사들처럼 픽픽 쓰러졌다. 내 처형식 날이 잡혔다.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마침내 내가 만든 동영상이 죄인의 시신처럼 내걸렸고, 5분, 10분이 50분, 100분으로 늘어나는 기적과 임사체험을 번갈아 맛본 뒤, 엔딩 자막이 올라갔다. 적막. 아 속 시끄러운 소리를 들을 때가 됐구나. 사회자가 일어나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의 목이 잠겨 있었다. 너무 잘 만들었다는 황송한 상찬이 이어졌다. 조합원들 속에서 나온 또 다른 조합원들이 인사를 건네었다. 냉소적인 반응을 예상했던 예능국에서까지 찾아와 잘 봤다며 악수를 청했다. 그날은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소소한 성공은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에 만든 동영상은 예상치 못할 정도로 반응이 컸다. 폭소가 이어졌고 주위를 돌아보는 시선과 누가 만들었냐며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가 만든 것이?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예상 밖의 경험은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닳고 닳은 방송쟁이들이 좋아할 정도라면 시청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스스로를 불운하고 능력 없는 PD라고 생각해왔지만 세상이 나를 보는 시선은 달랐다. 그 노조 동영상을 끝으로 6년 동안 제작에 손을 댈 수 없었지만, 내가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감이 바닥을 칠 때마다 동료 조합원들이 귓속에 꽂아넣어준 말들과 따뜻한 손길들을 생각했다. 내가 PD로서 뭔가를 보여줄 수 있겠구나, 처음 깨달았던 때가 바로 그때였던 것 같다. 


기형도 시에 나오듯이 '상장을 접어 종이배로 띄워 보내는' 유독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학급 임원을 맡겨도 뒤로 숨어버리던 성격으로 내 이름을 맨 앞에 달고, 내가 짜 놓은 기획으로, 만장한 감독들을 지휘하면서 서 있다.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는 순간이 펼쳐졌지만 자신감이 샘솟기는커녕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써 노력하고는 있지만 내가 왜 이 망신을 자초했는가, 밤에 벌떡 일어나 땅을 치며 한숨을 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런 태도는 겸손이 아니라 자기 비하이며, 나를 믿고 따르는 작가님들과 스태프들의 노력을 무화시키고 모욕 주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자기 비하로 일관하기에는 내 경력이 이미 바닥을 쳤었는데, 앞으로 내가 두려워할 파국이 무엇인가. 그러다가도 다시 '이게 되겠나' 마음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기 일쑤다. 지휘자가 뜻하지 않게 공석이 되어 대신 오케스트라 앞에 에 선 극장 사환처럼 항시 어정쩡하게 발을 얹어놓고 있으면서도, 마치 알프레드 프루프록과 같이 '내가 감히 우주를 뒤흔들 수 있을까' 회의와 야심이 뒤섞인 몽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마도 피디의 경력으로 자랑하기에는 창피한 그때의 소소한 경험들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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