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채원 Jan 02. 2021

1월 7일 밤 10시 20분 첫 방송!

심야괴담회 제작일지 4.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짐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특히 방송일은 돌발 상황에 잘 대처해야 하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PD는 갑자기 내맡겨지는 모든 결정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돌발 상황만큼 내게 고통을 안겨주는 일은 없다.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커서, 루틴과 징크스에 집착하는 나 같은 유형의 PD들에게는 특히나 더 그렇다. (지금은 많이 유연해졌지만 취재나 후반 작업을 하면서 양말과 속옷 색에도 집착하고 이치로처럼 음식도 가려먹던 때가 있었다.)


첫 방송일이 1월 6일 밤 9시로 잡혀있었지만, '청소년 보호시간대'에 틀기에는 수위가 높은 콘텐츠라는 내부의 판단 아래, 첫 방송이 1월 7일 밤 10시 20분으로, 1월 7일 예정되었던 두 번째 방송은 1월 9일 밤 10시로 급변경되었다. 편성 일정 변경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픽처 록(Picture Lock, 영상 편집 작업이 완료된 최종 편집본)이 완성되고 사운드 믹싱만을 앞두고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이 편성된 시간대에 맞도록 러닝 타임을 재조정해야 하고, 1회 말미에 MC들이 반복해서 언급하는 "내일 방송을 기대해주세요."라는 멘트들을 전면 수정, 삭제해야 한다. 녹화 때에는 '내일'이 맞지만 편성 일정이 변경되어 '모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결정에 대처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은 하루, 빠른 결정이 필요했다. 


연출의 욕심이야 한이 없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가는 첫 프로그램의 첫 방송이면 더욱 그럴 것이다. 속마음으로는 하루를 꼬박 더 투자해서 어떻게든 최대한의 질적 향상을 꾀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출진들은 고된 편집과 자막 작업으로 지친 상태였고, 하루 동안에 승부를 더 걸었다가는 믹싱 일정마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본방에서 에피소드를 덜어내어 유튜브 후공개본으로 돌리기로 했고,  '내일' 언급은 수정하는 대신, '편성 일정 변경으로 인해 1월 9일 방송'된다는 알림 자막을 비프음과 함께 여러 번 송출하기로 했다. "우리가 미켈란젤로가 아니며, 이 방송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노리는 것도 아닌데, 사람을 쥐어짜서 방송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연출진들에게 위로 아닌 위로의 말, 그리고 급작스러운 변경에 송구하다는 말을 전했다. 


연출자가 제작 일정에서 기로에 설 때는 어느 하나의 큰 희생을 요구한다. 스태프를 쥐어짜서 최대한의 효과를 노릴 것인가, 아니면 일정 정도의 완벽함을 포기하고 타협할 것인가. 자부하건대, 나는 PD 이력을 통틀어 항상 후자만을 택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연출로서 가장 수호해야 할 대원칙은 '만드는 사람의 행복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탐사보도의 취재 과정이라면 얼마든지 독살 맞게 매달려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탐사보도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제작 일정에서 제작진의 컨디션을 가능한 한 배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더욱이 우리 프로그램 같은 시청자들을 즐겁게 하고 웃겨야 하는 프로그램은 더더욱. 물론 이 말이 지켜지기 힘들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프로그램의 콘텐츠는 독하더라도 만드는 사람들 사이의 따스함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자기를 아끼는 사람에게 열의를 다 한다고 언제나 믿어 왔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단 한 번도 배신당한 적이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 공개처형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