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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Jan 05. 2021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심야괴담회 제작일지 5.

방송가에는 '쇼양'이라는 말이 있다. 교양에서 제작하는 예능 성격의 프로그램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 회사의 시사교양본부는 <PD수첩>을 필두로 한 시사, 탐사보도 프로그램은 강세지만 쇼양에서는 유독 약세를 보여왔다. 제시 잭슨 목사의 말처럼, 새가 두 개의 날개로 날듯이 탐사보도와 쇼양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시교의 모습임은 (몇몇 PD수첩 중심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교양 PD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느샌가 쇼양의 명맥은 끊겨버린 채, <PD수첩>을 모든 프로그램이 결사 옹위하는 유사 보도국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한때는 <경찰청 사람들>,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 등으로 예능 프로그램들을 뛰어넘어 드라마 히트작을 위협하던 교양국이 이렇게 전락한 데에는 당시 교양국을 이끌던 선배들의 단견과 오판도 있지만 시대적 상황도 한몫했던 것 같다. 황우석, 광우병, 한미 FTA 등으로 모든 뉴스 프로그램을 압도하는 화력을 보였던 <PD수첩>이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자, 이 프로그램을 지켜내야 한다는 의지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예능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고 교양의 경계들을 침범해오기 시작했다. <양심냉장고>, <느낌표>의  김영희 PD가 시작이었다. 게다가 <무한도전>의 등장은 교양과 예능 간의 격차를 훨씬 벌려놓았다. 교양이나 예능이나 연예인의 유무와 제작비의 규모 차이를 빼고는 프로그램 제작은 다 비슷하다는 이전의 안일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놨던 것이다. 이런 <무한도전>과 같은 리얼리티 쇼의 흥행은 다큐멘터리가 주던 실재에 대한 집착을 전유하고 다큐의 컷과 컷 사이에서 나오는 재미들을 보다 가속화시킴으로써 다큐멘터리를 위기에 빠뜨렸다. MBC 시사교양을 구축하는 양대 축인 <PD수첩>과 다큐멘터리 가운데 다큐멘터리가 위기에 빠졌다면, 그 역으로 <PD수첩>과 같은 탐사보도의 강화를 해답으로 보는 경향이 시교 상층부의 목소리가 되었다. 이런 목소리들은 오랫동안 시교의 지배적인 경향이 되었고, 실제로는 젊은 PD들이 이 과업을 도맡게 됨으로써 피로가 가중되었다. 그래서 젊은 PD들 사이에는 '제3의 길'로서 잃어버린 쇼양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폐기해버린 성공의 경험들 속에서 다시 되살릴만한 전통을 만들어 보기로 하는 움직임 속에서 한발 더 앞장서고 싶은 마음, 때가 되면 납품하는 공무원형 PD가 아닌 나만의 프랜차이즈를 시작하고픈 욕구의 일환으로 <심야괴담회> 기획안을 제출했다. 


그리스 신화에 '키마이라'라는 괴물이 있다. 사자의 머리, 숫염소의 몸에 뱀의 꼬리를 한 괴물이다. <심야괴담회>는 키마이라 같은 프로그램이다. 메인 연출과 조연출은 <PD수첩>, 작가진은 <수요 미식회>에서, 그리고 <쇼 미 더 머니>, <프리한 19>, <서프라이즈> 출신의 PD들이 한 팀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예능 및 쇼양 프로그램 제작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제작진의 몸에 예능 초심자 PD의 머리가 얹어진 형국이었다. 이러고 보니 키마이라까지는 아니고, 독수리의 날개의 암탉의 머리가 되어버린 이상한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닭의 머리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끌어간다면 독수리의 날개가 닭날개보다는 훨씬 높이, 그리고 훨씬 빠르게 목적지로 데려다줄 수 있다. 내가 스태프를 꾸릴 때, 가장 중요시한 덕목은 '이 기획에 얼마나 흥미와 열의가 있는가'였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전의 실패들을 반복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나는 우리 교양의 주된 병폐가 '전문성 없는 전문가주의'라고 생각해왔다. '전문성 없는 전문가주의'란 쉽게 말해, 하던 대로 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며, '스태프들의 전문성을 존중하기보다는 스태프들을 지엽말단적인 것에 입각해 지도하려는 태도'다. 물론 나는 이렇게 할 수는 있다고 본다. 단, 연출자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뛰어난 배경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갖고 뛰어든다는 점에서! 문제는 전문가적인 태도만을 앞세우려는 행태다. 내가 PD이므로 모든 것을 관장한다, 예능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사사건건 개입해서 바로잡아나가야 한다. 이런 강박의 발로다. 나는 이 병폐를 알고 잘 극복한 선배들이 굉장한 리더로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런 전문가주의에 빠져 지엽말단에 집착하고 제작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오판들이 더 많았다. 이런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태도를 바꿔야 했다. 예능에서는 재미가 있으면 그만이다. 여기에 교양처럼 의미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 프로그램은 이미 문예부흥, 소통 증대, 콘텐츠 진흥이라는 대의를 충족했으니 그다음은 무조건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 일환으로 교양과 예능이 결합할 때, 기존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엽적인 개입들을 잘 차단하고(나의 은근한 다혈질적인 성격이 '잘'하지는 못하도록 했지만) 예능 스태프의 전문성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이 관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성공했느냐와는 별개로, 나는 결과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이 컷과 저 컷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연출자의 편집 지식과 역량을 과시하기보다는, 내가 모르는 부분을 겸허히 인정하고 '얼마나 시청자를 재미있게 하는가'라는 결과에 집착하기로 했다. 병사의 전투화에서 광이 나기를 기대하는 장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지론으로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보다 얼마나 재미있게 일하고, 얼마나 재미있는 결과가 도출되었는가를 더 중요시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하기는 정말 어려웠는데, 지금 내가 개입해야 할 사항인지 아닌지, 이 개입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와 연차와 성향이 비슷하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또 다른 PD가 곁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내심 바랐지만 PD란 원래 외로운 직업 아니던가. 그저 순간순간의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잘 대처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내가 잘한다, 내가 다 알고 있다'는 자기 확신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근거가 없는 자기 확신이어서는 안 된다. 타인의 비판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잘한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구체적인 근거를 스스로에게 제시하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의 멱살을 잡고 몽매의 지옥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유사 무속인들과 같은 어사무사한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자기도취에 빠지는 대신, 주제에 대해서 스스로의 주관을 확립하고, 연출의 지향과 입론을 세우며, 실천으로서 증명하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기란 어렵다. 항시 쉽고 편한 길을 두리번거리며 애꿎은 글로 자기 정당화를 늘어놓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어려운 길과 내가 가고자 하는 일을 부단히 등치 시키려는 노력을 유지해나갈 때야 비로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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