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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Mar 17. 2023

어차피 안 볼 텐데

다큐 입문기

엄혹한 시절이었다. 높은 분들 눈에 띄지 않도록 숨죽여 철야근무를 하던 시절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담당 부장이었다. "다시 제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본부장님께 선물을 갖다 드려야 한다." 노조 탈퇴라는 이름의 선물. 박근혜 정부는 언론 노조를 말살하기 위해 갖은 꾀를 내고 있었고, 노조를 탈퇴시킨 보직자는 능력 있는 보직자가 되던 때였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눈 한번 질끈 감는 것이 무엇이 어려운가. 하지만 해고당한 선배들보다도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차 아이가 자라서 내게 물을 것인즉, "아빠는 박근혜 때 뭐 했어?", "응, 아빠는 영애님 찬양하면서 방송 잘했어. 그래서 우리 모두 행복했단다." 부장에게 답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를 아끼던 부장이 말했다. "아이 아직 젊은데.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안 될 것 같아요."


그 길로 구로디지털단지 오피스텔에 마련된 사무실로 발령을 받았다. 공교롭게 아이가 아파서 입원하던 날이었다. 아이에게 신념 없는 연체동물 아빠는 되기 싫었다고 자위했다. 하지만 속은 무너져 내렸다. 그다음 인사 때 승진에서 누락되었고 저성과자 명단에 올랐다. 저성과자들은 따로 마련된 방에서 2주 동안 심리상담을 비롯해 온갖 이상한 교육을 받았다. 저성과자 교육의 함정은 이런 것이었다. 정말 노조 탈퇴 거부자들로만 교육이 이루어지면 이른바 '신천교육대'처럼 제 나름으로 분위기도 좋고, 화기애애하련만 노조 조합원과 정말로 업무 수행이 불가한 진성 저성과자를 한데 섞어놓기 때문에, 2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과연 이 사람이 미친 사람인가? 이 사람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내가 미친 사람인가?" 몰아지경의 열패감에 빠진다. 울적한 가운데 유일한 위로는 저성과자는 상암으로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정든 선배, 동기들과 점심시간이나마 얼굴이라도 맞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 동기들과 점심을 먹는데 다큐멘터리 부서에 있던 동기가 자기네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1퍼센트 언저리를 웃돈다면서 제작에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그때 나는, "무슨 소리냐? 이때야말로 기회다. 자막도 세로로 넣어보고 흑백으로도 찍어보고 너 하고 싶은 것 다 해라. 어차피 아무도 안 볼 거면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좋은 거 아니냐." 다큐멘터리에 대한 시청률 압박이 사라졌고 잃을 것이 없어졌으니 오히려 가지 않던 길을 감으로써 호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농담 섞인 말이었다. 동기들은 사람이 저성과자 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웃어넘겼지만, 그때 나는 절반 정도 진심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잃을 것이 무엇인가. 이제껏 시도했던 틀을 파괴하고 방향전환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멀고 먼 길을 돌아, 우여곡절 끝에 다큐 팀으로 왔다. 처음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볼 기회이지만, 내 역량에 따라서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 프로그램으로 인해 윗선과 갈등이 있었고, 조직 내부에서도 내 거취를 배려해 줄 깜냥은 되지 않았기에, 배당된 예산은 적고 편성은 불안하고 다큐멘터리에 대한 기대는 더더욱 없다. 이때야말로 다시 찾아온 기회다. 나는 내가 실천할 수 없는 충고는 남에게 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는 실천으로 보여주는 길 밖에는 없다고 믿는다. 동기들과의 점심에서 했던 말은 나 자신에게 해주는 충고이기도 하다. 내게 아무런 기대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차피 아무도 안 볼 것이라면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첫 회의 때, 모든 스태프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볼 텐데 시청률 따위 기대하지 않는다. 미친놈이 만들었다고 세상이 수군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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