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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Apr 29. 2023

필름을 남기남?

다큐 입문기 2. 

2부 엔딩을 오늘 찍었다. C700에 지미집까지 동원했지만 원하는 만큼의 그림을 얻었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연출 앞에서 유독 작아지는 것 같다. <PD수첩>을 오래 해서일까? 그런 작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관성을 이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힘든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시사교양 파일럿 10년의 암흑기를 끊어냈다는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나는듯한 심정이다. 틀을 짜놓고 섭외를 잘하면 알아서 굴러가는 토크 쇼와는 달리, 다큐멘터리는 내게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네가 보여주고 싶은 게 뭔데?" 기술과 재능의 영역을 쉴 새 없이 넘나들며 사람을 괴롭힌다. 


작가들에게는 "장면 A와 장면 B의 비약이 있더라도 커트로 붙이면 된다. 이게 몽타주 효과다."라든가, "무성영화에서처럼 블랙 백에 타이포를 슬로건처럼 박아서 넘어가자. 다 잘 될 것이다."라고 늘 외치지만,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그 말을 과연 남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잠과 입맛이 없어지고, 쉬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진다. 이 난관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 아직도 모르겠다. 제작 초반만 하더라도 "시청률 신경 쓰지 말자.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만 집중하자."라고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욕심도 나고, 보여주고픈 것도 많아지는데, 이와 반비례해서 자신감은 점점 떨어진다. 과연 이 길이 맞나? 내가 만든 것을 보고 사람들이 비웃으면 어쩌지? 다큐를 처음 만들어보는 것이라 실패해도 괜찮을 것이라 자위하지만, 뱅크시의 첫 다큐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를 보면 때로는 경험과 시간의 축적을 뛰어넘는 재능이라는 것도 있나 보다. 


나는 어떤 재능을 가진 사람일까? 불타는 예술혼도, 장인의 집요함도 없다. 오로지 끊임없는 아이디어와 극도의 효율성뿐. <불만제로>를 연출할 때, MC였던 권진영 씨가 내 촬영방식을 보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와, 이 감독님 보면 남기남 감독님 생각 나!" 남들이 한 편 찍을 적에 여섯 편을 찍고, 두 편의 영화를 한 번에 몰아 찍고, 이 영화 찍으면서 다른 영화에 들어갈 인서트 컷을 찍는 등, 극단적인 효율성으로 셀 수 없을 양의 필모를 남겨, "그럼 필름을 남기남?" 했다는 불멸의 감독. 남들보다 적은 예산으로 빨리 찍는다. 아침 방송을 연출할 때는 재연 6개를 하루 만에 찍은 적도 있다. 야산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을 여의도 MBC 화단에서 흙과 잔디와 재연배우만 노출시킨 상태에서. 내게 사소한 재능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빡센 레귤러 프로그램을 연출하면서도 스태프들과 소풍을 가고, 식사시간과 휴일을 지키면서 일해도 며칠 밤을 새워만든 프로그램에 뒤지지 않는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는 법. 이걸 재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런 재능만큼은 (물론 아이템과 프로그램에 잘 적응했다는 가정 하에)  MBC내의 어느 PD한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번 다큐는 <PD수첩>보다도 적은 예산에, 실제작기간 6개월 (모든 스태프가 모여 팀을 이룬 뒤로부터는 4개월)만에 2편이 만들어진다. 외부촬영을 최대한 줄이고 아카이브를 활용해 제작비를 대폭 낮췄으며, 가능한 한 사내인력을 활용하고, 스태프들 먹이거나 사전 취재 비용에는 사재를 털어 넣었다. 그렇게 아낀 제작비로 아트 디렉터를 초빙해서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퀄리티를 높였고, 프로듀서 오리진을 비롯해 빛과 소금, 신촌 블루스, 사랑과 평화, 아침 등에서 활동한 최고의 뮤지션들을 섭외해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만들었다. 이번 프로그램이 잘 만든 다큐는 못될지 몰라도, 없는 살림으로 효율적으로 만들었음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 언젠가 후배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2,3억짜리 큰 프로젝트 말아먹으면 그다음 기회는 없다. 하지만 푼돈으로 성과를 내면, '에휴 저 자식 어차피 싸구려로 찍어서 제작비 펑크는 안 내는데 한번 더 믿어보자'며 몇 타석 더 설 수 있다. 그러면 성공의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다. 요즘 콘텐츠 과잉의 시대다. 대형 프로젝트를 이끄는 스타 피디의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대박이 아닌 중박으로 근근이 벌어먹고 사는 애들의 전성기가 올 때, 가장 각광받는 가치가 이런 경제성, 효율성일 것이다." 그렇다. 큰 기회는 큰 피디들에게 갈 것이다. 우리 같은 소상공인 피디들이 살아남는 길은 효율성, 또 효율성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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