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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다은 변호사 Dec 27. 2023

국민참여재판 후기, 소회



페이스북에 연재한 내용을 블로그에 옮겨 봅니다.


< 국민참여재판 소회 >


0-1. 들어가며 


그간 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후기를 못쓰고 있었습니다. 만장일치 무죄 판결 받은 자랑글만 썼었는데, 국민참여재판 절차 자체를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오늘 기억을 더듬어가며 써보려고 합니다.


0-2. 감사의 마음


저는 대부분 형사사건을 맡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참여재판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배심원선정절차 등에 대해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세 번의 국민참여재판을 경험한 손영현 변호사가 머릿속으로 법정이 그려지도록 설명을 해준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해당 재판이 진행되는데 많은 준비를 해주신 대전지방법원과 재판부에 계시는 모든 분들, 전날 잠도 잘 못 자면서 재판을 준비했다던 공판 검사 두 분, 그리고 12시간 넘게 법원에서 나가지 못하고 재판에 몰두해주신 일곱 분의 배심원 및 한 분의 예비배심원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해봅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0-3. 재판 준비물


대포만한 텀블러(+물컵), 노트북이 필수입니다. 


법정 내부는 건조하고 말을 많이 하다보면 목이 바싹바싹 마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포만한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서 재판 내내 마셨습니다. 재판 진행하는 동안 총 3통의 물을 마셨고, 피고인신문을 하면서 피고인도 힘들어 하는 듯 보여, 물을 한 잔 따라서 증인석에 놔준 적이 있습니다. 목이 메이면 말하는 사람은 물론 듣는 사람도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를 위해 물은 충분히 마실 수 있게 준비하는 게 좋습니다.


피고인 석에 화면을 공유하는 노트북이 있어서 그 노트북을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만, 변호인은 자신의 노트북을 들고 가서 이용하는 게 좋습니다. PPT는 모두절차와 최종변론 때 메인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경우 증거조사 시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충해야 하는 일이 계속 생깁니다. 그러니 그때마다 계속 노트북을 이용해서 수정하고 마지막에 최종본으로 제시하는 것이 변론에 큰 도움이 됩니다.


0-4. 오전 법정의 분위기


저는 오전 9시경 법원 1층에 도착했는데요. 법정의 분위기는 매우 분주했습니다. 1층 검문검색대에는 '배심원으로 오셨어요?'라는 질문이 계속 들렸고, '네'라는 답이 들리면 '230호실로 올라가시면 됩니다'라는 설명이 돌아갔습니다. 


저는 묵묵히 230호실로 올라갔는데 법정 앞은 배심원후보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번호 표찰을 나눠주느라 분주했습니다. 죄명을 확인하지 못하고 출석을 했는지, 법정 앞 사건 죄명을 보고는 '허허, 강제추행이네?'라고 웃어버리는 배심원후보자님도 계셨습니다.


변호인 석에 자리잡고 노트북을 멀티탭에 연결하고, 대포만한 텀블러도 책상 밑, 손이 잘 닿는 위치에 두었습니다. 배심원 후보자 명부, 사건 기록 등을 찾기 쉽게 세팅하고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배심원 후보자들은 각자 번호 표찰을 가슴에 달고 방청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방청석 자리가 부족하자 법원 직원들이 분주하게 의자를 나르며 자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재판장님이 들어오시기 전까지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은 긴장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평소 진행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의 재판이었기 때문에 평소 법정이 친숙한 재판부, 검사, 변호인도 긴장하고, 배심원 후보자들도 낯선 분위기에 긴장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사실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절차가 연간 100건 정도 진행된다고 하고, 대전지방법원의 경우 1월에 한 번, 그리고 12월 저희 사건으로 또 한 번 진행되어 2023년에는 딱 2번 진행되었다고 하니, 현장에 있던 대부분(어쩌면 모두)는 해당 절차가 처음이고 그러니 낯설고, 혹시라도 예측하지 못한 어떠한 사고가 발생하진 않을지 걱정도 되고 하였을 것 같습니다.


0-5. 배심원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가 되어도 오전에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하면 얼마나 지루할까요. 국민참여재판을 해보기 전에는 배심원분들께서 오후 재판 진행 동안 집중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9시 즈음 마지막 조서열람 시까지 어떤 배심원분도 허투루 사건 내용을 보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느 국민참여재판에서 재판장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만큼은 여러분이 판사입니다" 


정말 그러했습니다. 모든 배심원분들께서는 당일 배심원 석에 앉아 이 사건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무게, 이 사건의 피고인에게 과연 벌을 내릴지 여부는 저 법대에 앉아있는 판사가 아니라 내 손으로 결정한다는 생각으로 진지하게 모든 절차를 임하고 계셨습니다.


0-6. 국민참여재판의 의미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이 참여해서 일반 시민의 법감정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중요한 절차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법원이 기존 판결문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귀감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자리입니다. 그날의 재판을 위해 몇 날 며칠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법원, 검찰, 변호인, 배심원... 모든 사람이 헌신하여 만든 자리이기도 하고요.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국민참여재판을 하겠다고 결정하기까지의 길은 매우 험난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수가 극히 적은 것이지요.


간혹 '법조인이 아니라 일반 국민이 봐도, 피고인의 행위를 유죄라고 생각할까?' 싶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도 그러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국민참여재판 희망 의사를 밝혔고, 이후 피해자가 강하게 거부한다는 명시적인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재판부를 설득한 끝에 국민참여재판 절차로 사건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일반 시민이 납득할만한 판결을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법원이 더욱 넓은 마음으로 국민참여재판을 받아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국민참여재판 후기 >


1. 국민참여재판에 이르기까지


해당 사건은 고정사건이었습니다. 단독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국민참여 재판 절차를 위하여 합의부로 이송하여야만 했습니다. 합의부로 이송된 후, 이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하는 것에 대한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고, 피해자가 반대하자 이 사건이 굳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재판부를 설득시키는 절차가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총 단독 공판기일 1번, 합의부 공판준비기일 2번이 이어진 후, 국민참여재판으로 사건을 진행하기로 결정되었고, 이후 1번의 공판준비기일이 더 진행되어, 이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기까지 총 4번 법원에 출석해야만 했습니다.


공판기일 며칠 전에는 저희 법무법인으로 두툼한 우편물이 도착하였는데, 이는 법원이 변호인에게 보낸 '배심원 후보자 명부'였습니다. 총 76명의 후보자가 회신한 자료의 사본에는 해당 배심원 후보자의 이름, 성별, 연령, 직업, 최종학력 및 본인 혹은 가까운 이가 범죄 피해 경험이 있는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지 등이 간략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명부를 미리 확인해서 배제하고 싶은 혹은 꼭 배심원으로 선정하고픈 사람을 체크해가면, 배심원선정절차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법원의 재판 진행 예정 시간


09:30~10:30 배심원 선정절차


10:30~12:00 모두절차 및 증거조사


12:00~13:30 점심식사 및 휴식


13:30~15:30 증인신문 및 증거조사


15:30~17:30 피고인신문, 최종변론 및 재판장 설명


17:30~19:00 평의/양형토의


19:00~19:10 판결선고



재판 시작 전에 재판장님이 설명해주신 [오늘의 일정]은 위와 같았으나, 실제로는 증인(참고인)신문 14:20~14:45, 증인(피해자)신문 14:55~16:45 진행되어 전체적으로 약 2시간 가량 절차가 지연되기는 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의는 19시 이후 배심원들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진행했습니다. 선고는 21:50분에 있었고요.


3. 배심원 선정절차


배심원선정절차는 정말 어렵습니다. 일단 비공개 재판이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많은 수의 후보자들을 파악해두어야 하고, 검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체크, 변호인이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체크해가며, 의견을 재판부에 피력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 바쁩니다.


재판을 하기 며칠 전에 '혼자서는 국민참여재판 힘들어서 못하니까. 변호인 한 명 더 데리고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에게 현재 어쏘가 없는데다, 대전 재판에 1박 2일로 함께 가기에 마땅한 변호사가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 혼자 갔습니다. 


사실 다른 절차에서는 혼자 해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는데, 배심원 선정절차를 하면서는 왜 혼자 가면 힘들다고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일단 배심원석에 앉은 후보자 8명을 재판장님께서 번호로 부르는 걸 받아 적어야 하고, 그러면서 그분들에 대한 후보자 명부 상의 내용을 재빨리 체크해야 합니다. 그러면 검사가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동안 어떤 번호의 후보자가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을 할 것 같은지, 혹은 검찰 측에 유리하게 판단할 것 같은지를 체크해야 하며, 변호인이 나가서 질문을 할 때 어떤 후보자가 어떤 인상인지까지 계속 체크하고 정리를 해야하는데, 이 절차가 생각보다 바쁘게 진행됩니다. 혼자서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배심원선정절차에 더 공을 드려야 하는 사건이라면 꼭 변호인 두 분이 가셔야 합니다. (참고로 공판 검사도 두 명이 출석했습니다.)



무이유부기피신청은 총 4명까지 가능한데, 당일 검찰과 저는 각각 3명의 후보자를 무이유부기피하였습니다. 이런 절차가 한 번 더 있었고, 총 1시간가량 소요된 배심원선정절차가 끝이 났습니다.


4. 모두절차


배심원선정절차가 끝나야 피고인이 법정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 전까지 변호인-피고인 석에는 저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배심원이 8명으로 정해지고(7명이 배심원, 1명은 예비배심원 - 그러나 누가 예비배심원인지 평의 전까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총 8명으로 배심원을 정하고 계속 절차를 함께 진행합니다) 피고인이 착석하면 모두절차가 진행됩니다.


모두절차에서는 검사 측, 그리고 피고인 측이 각각 PPT로 이 사건의 개요에 대해 설명합니다. 검사는 공소사실을 진술하고 어떤 내용이 쟁점인지를 짚어주었고, 변호인은 앞으로 어떤 부분을 주목해서 보셔야 하는지 설명하고 사건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주는 정도로 설명하였습니다.


5. 증거조사


검사는 PPT로 피해자의 고소장, 신문조서 등을 정리해서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재판장님께서 원본도 제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검사는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채택된 증거 원본을 실물화상기를 통해 배심원에게 일일이 제시하며 해당 증거의 각 취지를 구두로 설명하였습니다.


증거조사는 오전 중에 마치지 못했고(제가 모두절차를 길게 하다 재판장님으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죄송합니다.. 변호인 여러분 모두절차에서 너무 열정을 쏟지 마세요.. 하하..) 12:15 즈음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고, 13:30경부터 나머지 증거조사를 하면서 오후 재판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검사 측 증거조사가 마무리 되면, 피고인 측에서 제시할 증거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뤄집니다. 저는 카카오톡 대화 캡쳐 사진 등 총 7장 정도의 사진만 증거로 제시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간단히 사진들을 제시하며 이게 어떤 취지로 활용될 것인지를 설명하며 증거조사를 마쳤습니다.


6. 증인신문 및 피고인 신문


이 사건에서 증인신문은 공판준비기일에 협의를 한대로 "증인(참고인)신문 > 증인(피해자)신문"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상을 빗나가는 질문이나 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굉장히 뻔한 이야기들이 오고가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행하는 내내 신문사항도 계속 수정해야만 했고, 최종 자료도 수차례 수정하였던 것입니다.


증인(피해자)신문은 성폭력범죄 사건이기 때문에 중계로 진행하기로 공판준비기일에 미리 협의되었습니다. 차폐막을 설치하고 진행할 수도 있고, 영상 중계로 진행할 수도 있다고 인지는 하고 있었는데, 막상 당일이 되어보니 영상 중계가 아니라 음성 중계였습니다. 이에 피해자가 진술하는 모습이나 태도를 볼 수 있도록 영상 중계로 진행되길 희망한다는 점을 피력하였는데, 재판부에서는 성폭력범죄 피해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문이 진행되다 보면 아무래도 배심원들이 꽂히는 문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피고인에게 불리한 사실 혹은 피고인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문답에 관해서는 반대신문에서 최선순위로 질문, 방어를 하였고, 이후 준비해 간 질문을 순서대로 진행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배심원의 입장에서는 당사자들의 인상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가장 신경을 썼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엉뚱한 답이 나오기도 하고, 검사 측에서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기 때문에, 증인신문과 피고인신문이 진행되는 동안은 초집중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상과 다른 문답이 제법 나와서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판사, 검사, 변호인은 서로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경우 해당 질문이 어떤 목적으로 어떤 답을 얻어내기 위해 하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심원이나 증인 혹은 피고인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일반 공판절차라면 굳이 하지 않았을 질문을 하기도 하고, 했어야 하는 질문을 빼기도 했습니다.


7. 최종 변론 및 재판장 설명


피고인 신문을 마친 후 재판장님은 수사단계에서 작성된 피해자 측 신문조서와 피고인 측 신문 조서 실물을 배심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피해자와 피고인이 모두 수사단계에서 총 3차례(경찰 2, 검찰 1) 조사를 받아 조서가 각 3개씩 남겨진 사건이었습니다. 상당히 다툼이 심했고, 수사기관에서도 판단하기 쉽지 않았던 사건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지요.


이에 마지막 작성 조서인, 검찰 작성 피해자신문조서와 피의자신문조서를 한 장 한 장 열람하였습니다.


이후 검찰 측 최종 의견을 진술하며 PPT로 피해자의 진술이 상당히 일관성이 있으며, 따라서 피고인의 추행 혐의가 인정될 수밖에 없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변호인의 최후 변론이 진행되었는데 진술의 일관성만으로 그것이 사실임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피해자의 진술에 모순이 많아 신빙성이 없다는 점에 대해 상세히 밝혔습니다.(이 부분은 영업비밀이므로 간략히.. 응?)


이후 재판장님께서 배심원분들께 남은 절차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사건에서 검사, 그리고 변호인의 의견과, 증거는 구분되어야 하며, 어떠한 부분까지가 증거임을 다시금 주지시켜 주셨습니다.


8. 평의 절차(선고를 기다리며)


배심원들은 평의실로 이동하였고, 평의가 끝나면 법원에서 변호인 휴대전화로 전화를 줄 것이니 그때 법정으로 피고인과 함께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저와 피고인은 법원을 나가 각자 저녁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밤은 어두워졌고 법원을 빠져나가는 제 차량번호가 인식되자 "블랙리스트"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찍혔습니다. 오랜시간 법원 주차장에 주차한 차량이라는 것인데 상당히 민망했습니다(아 이거 풀어달라고 재판부에 얘기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깜빡했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저는 직원과 함께 대전에 내려갔기 때문에 둘이 밥을 먹으러 갔지요. 직전까지 신경을 온통 곤두세웠고, 선고를 앞둔 상황이라 긴장이 되니 쌀을 씹는지 돌을 씹는지도 모르겠더군요.


일반 시민이 제가 변호하는 사건을 판단하는 일이 처음이다 보니, 판사가 어떻게 판단할지 예측하는 것과는 달리, 결과가 전혀 읽히지 않았습니다.


보통 평의시간이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우리 사건의 경우 식사를 하면서 평의를 한다고 하니 좀 더 걸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직원이 저에게 '만장일치 무죄라면 평의가 빨리 끝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는데, 그건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만장일치가 아니라면 평의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유죄로 결론이 난다면 양형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야 하니, 아무래도 만장일치 무죄보다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겠지요.


'아.. 무죄 나왔으면 좋겠다..', '무죄 안 나오면 어쩌지?', '무죄 나올 거 같아? 어때 보였어?', '하아..'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흘렀습니다. 이렇게 밖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그냥 법원에서 대기하다가 빨리 선고 듣는 게 낫겠다 싶어서 법원으로 이동했습니다. 피고인에게 '법원에서 기다리려고 지금 돌아가고 있다'고 하였더니, 본인은 이미 법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법원에 주차를 하고 1층 출입구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평의가 끝났으니 법원으로 돌아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평의가 시작되고 약 1시간 30분 정도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직원은 '평의가 빨리 끝난 거 같아요!'라며 은근히 만장일치 무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의 첫 국민참여재판이기도 했고, 저랑 몇년 째 함께 일하고 있는 우리 직원이 제가 하는 재판을 처음으로 방청한 사건이기도 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은 결과를 내어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오 저렇게 기대하는데 잘 안 되면 어쩌지' 걱정도 했답니다.)



9. 판결선고


법정에 들어오니 배심원들은 모두 배심원 석에 착석한 상태였고, 재판부, 검사는 아직 법정에 들어와 있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은 피고인 석에, 저는 변호인 석에 착석해서 재판부가 들어오길 기다렸습니다. 10분 정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피고인이 계속 한숨을 쉬며 덜덜 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무슨 대학 입시 합격 통지 기다리는 사람처럼 긴장이 되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인터넷 기사 같은 거 찾아보며 정신을 분산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재판부가 들어왔고, 재판장님께서 평의 결과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평의 결과가 나왔고요. 만장일치 무죄 의견이시네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식사는 잘 하셨어요?'라고 묻는 말투로 말씀하셔서 좀 놀랐습니다. 드라마처럼 재판장님께서 근엄하게 "피고인에게(..!!) 무죄를(아아!!) 선고한다(와아!!)" 이런 느낌 아니더라고요)


재판장님의 입에서 '무죄'라는 단어가 나오자 피고인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재판장님께서 배심원의 의견과 재판부의 의견이 같아, 무죄로 선고한다며, 피고인은 무죄판결의 공시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피고인은 괜찮다고 하였고 그렇게 절차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변호인 석에서 일어서서 피고인과 악수를 하며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인사를 하였고, 피고인은 악수를 하며 허리를 숙여 "변호사님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계속 울었습니다.(이건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과 비슷했습니다)


10. 선고를 마치고


다수결 무죄가 나오는 경우 항소심에서 뒤집어질 가능성이 높고, 만장일치 무죄가 나와야 항소심을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만장일치를 바랐는데, 그렇게 나와서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아직 항소심 절차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봐야겠지요)


우리 직원은 법정을 나서며 매우 기뻐하였고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라며 웃어주었습니다. 뭔가 사장으로서 면이 서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드디어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 법정 분위기가 어땠다', '증인신문 때 이 부분이 어땠던 거 같다'라며, 길고 긴 재판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법원을 나서며 찍힌 저의 차량 번호에는 다시 한 번 "블랙리스트"라는 문구가 번쩍였습니다. 


저녁 한산한 길을 운전해서 호텔로 돌아 가는데 마치 오늘 하루 벌어진 일들이 꿈인 것만 같았고, 참 힘들었지만 보람찼고, 여러 의미로 기분이 좋고 그랬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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