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성실했을 뿐인데, 왜 재앙이 오는 거죠?

늦깎이 ADHD의 브레인 튜닝로그 #2-5 실행 기능 문제

by 책판다

ADHD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기 #2-1

연재중인 ‘ADHD,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의 제목을 ‘늦깎이 ADHD의 브레인 튜닝 로그’로 바꿉니다.

ADHD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강조하고 싶었고, 기존의 제목이 8년 전 영화 대사의 인용이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네요! 앞으로는 ‘지금’ 써내려가는 ADHD 사용설명서를 함께 만나보시길 희망해봅니다.






영혼을 끌어모은 노력이 불러온 참사


Ep1. 오탈자 농사꾼의 풍년 시대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니 광고주 담당자였다. 조금 전 퀵으로 보낸 출력물이 도착할 즈음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전화가 온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짧은 순간 전화를 받지 않을 핑계 일곱 가지를 떠올렸지만, 언제나 그렇듯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판다 대리님, 교정 보신 거 맞아요?”

“네 대리님. 화면으로 한 차례 보고 출력한 거예요.”

“아니, 교정을 보셨는데 왜 이렇게 오탈자가 많아요?”

“네? 제가 분명히 교정을 봤는데…”

사보 편집자로 일하면서 디자이너에게 교정지를 받을 때마다 이번에는 반드시 오탈자를 모조리 색출해내겠다고 다짐했지만, 지켜지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오탈자가 편집자 모르게 자라나는 잡초 같은 존재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오?

오탈자를 재배하는 ‘못된 습관’은 디지털 마케터로 전업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보 편집자 시절과는 달리 엑셀을 써야 할 일이 정말 많았는데, 그곳은 나에게 분명 ‘지옥’이었다. 심지어 금액을 잘못 보낸 견적서를 보낸 적도 있는데, 생각 밖에 저렴한 견적 때문에 화색이 돌던 광고주에게 이런 ‘대실망’을 안겨준 게 대체 몇 번째인지….


Ep2. 이러라고 미팅에 보낸 게 아니었는데…

“판다 과장, 미팅 잘 다녀왔죠? 회의록 정리해서 전달해주세요.”

“네, 팀장님. 내일 오전 중으로 전달드릴게요!”

그날 나는 외부 협력사와 신규 업무 착수를 위한 미팅에 다녀온 참이었다. 이런 미팅은 적어도 팀장급 인원이 함께 동석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그날따라 우리 팀에서 챙겨야 할 미팅이 너무 많았고 부득이 나 혼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흔쾌히 문제없다는 답장을 받았고, 그렇게 나는 혼자 미팅에 참석하게 됐다.

한 시간 동안 이어진 그날의 미팅에선 협력사의 요청과 당부가 출렁출렁 넘쳐났다. 나는 “아 네” “물론이죠.” “알겠습니다”와 같은 추임새 말고는 할 말이 없었고, 나는 협력 업체 팀장님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기만 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그날 나는 받아쓰기를 100점을 받지 않으면 혼나게 될 초등학생처럼 ‘정말로 열심히’ 했다. 사실 내 직급 정도라면 누구나 소화할 수 있는 미팅인데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서 송골송골 땀이 맺힐 정도로 긴장까지 했다.

최선을 다해 받아 쓴 메모를 회의록의 형태로 옮겼고, 회의록과 메모를 사이를 무한대로 오고 가며 크로스 체크까지 반복했다. 아, 이번엔 괜찮겠네, 안심한 나는 퇴근 전 메신저로 업무 방에 회의록을 전달했고 팀 공용 드라이브에 업로드까지 마무리해두었다. 보기 드물게 잔여 업무가 없는 하루였다. ‘회사 다니면서 이런 날도 있어야지.’ 그렇게 아주 보람찬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인플루언서 섭외까지 우리가 진행한다는 거죠?”

“네, 팀장님 그 업무까지 저희에게 진행 요청했습니다.”

“대행료는 인플루언서 섭외비까지 포함해서 계산서를 끊으면 되는 거죠?”

“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미팅 다녀오느라 수고했어요.”

다음날 팀장님은 회의록을 살펴보며 궁금한 점을 물었고, 미팅 건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 뒤 팀장님은 내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판다 과장, 인플루언서 섭외를 우리가 하는 게 맞아요?”

“네, 맞는데 혹시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나요?”

“지금 그쪽 팀장은 인플루언서 섭외를 자기 회사에서 직접 진행하겠다던데?”

“아… 네?”

놀란 나는 500원 동전 크기로 눈을 뜨고 팀장님을 바라보았다.

“아니, 제대로 듣고 온 게 맞아요? 지금 상대방 팀장이랑 말이 맞지를 않아서.”

“잠시만요, 제가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곧장 내가 남긴 메모를 확인하니 ‘인플루언서 진행’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래, 인플루언서를 진행한다고 했잖아.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러나 채 1초가 지나기도 전에 새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가 섭외하는 게 아니었던 거야?’

말 없이 화면만 바라보던 나는 나무늘보처럼 고개를 돌리며 팀장님께 말씀드려야 했다.

“팀장님, 제가 잘못 적은 것 같습니다.”

대체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는 팀장님의 헛웃음과 함께 내 심장은 푹 꺼져갔다.




내 뇌에서 일어난 일들: 연쇄 인지 폭발

읽으시는 분들은 아마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 없는’ 것 외에 딱히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일들을 대체 왜 늘어놓았는지 궁금하실지도 모르겠다. ADHD 진단을 받은 후에도 ‘아 모르겠고 ADHD 때문이잖아.’ 라는 말만 (마음속에만) 떠올랐다. 이런 일들이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달은 건 ADHD를 공부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모두들 궁금해하실 테니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입력된 정보 중 ‘중요한 정보’를 골라내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수많은 정보 중 그 의미와 중요도가 같지 않다는 건 웬만한 성인에게 기초적인 상식 아닐까? 이제는 ‘바다’라는 말로도 묘사가 벅찰 정도로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보 필터링의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을 터다. 문제는 ADHD인들에게는 이 상식을 지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걸 거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중요하지 않은 걸 놓지 못한다는 것이 이 ‘사달’의 핵심이었다. 관련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이 대목이 ‘과잉 행동’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좀 억울하면서도 어리둥절했다. 어쨌든 영혼을 끌어 모아 최선을 다 했는데도 결과가 이 모양이라는 게 억울했고, 그 누구도 나의 ‘침착함’을 의심하지 않는 와중에 ‘과잉 행동’이 문제였다는 게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애로사항을 호소만 하고 있을 순 없어서 조금 더 정확히 알아보기로 했다. 대체 내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① 고장난 브레이크: 억제 조절(Inhibitory Control) 저하

신경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실행 기능’은 ‘고위의 인지기능으로,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며, ‘인지적 유연성’, ‘작업 기억력’, ‘계획’, ‘억제’, ‘틀 전환’ 등을 포함한다.1) 이중 오탈자와 회의 내용을 놓치던 내 문제와 관련해서는 ‘억제’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억제는 문제해결을 위해 중요하지 않은 자극이나, 정보, 그리고 반응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되는데,2) 파도처럼 밀려오는 정보 사이에서 의미 있는 정보가 나타날 때 맞춰 뇌가 브레이크를 밟는 능력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문제는 나 같은 ADHD인들은 이 브레이크가 고장 나 있다는 점이다. 한 실험에서 ADHD인들을 대상으로 억제 관련 테스트, 특히 지속 수행 검사(Continuous Performance Test)에서 통제집단 대비 작위 오류(Commission error) 관련 실수가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3) 여기에서 작위 오류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실수’를 의미하는데,4) 내 경우에 빗대어 보면 미팅 시간에 폭포처럼 쏟아지던 (이게 설교인지 회의 코멘트인지 모를) 요청사항을 주워 삼키느라 머리가 어지러워진 나머지,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려는 자동 반응(대충 결론 내리기/빨리 끝내기)을 잠깐 멈추고 질문을 던졌어야 하는데 이 중요한 타이밍에 머릿속 브레이크가 고장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브레이크가 고장나면, 청소기의 흡입력이 무섭게 올라간다는 사실을.

② 필터링 실패: 입력이 멀쩡한데, 출력이 왜 이래?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반응하기까지, 우리의 뇌에 입력된 정보들은 자신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며 경쟁을 치른다. 그런데 사실 이 경쟁은 ‘답정너’처럼 보이는데, 지금 필요한 정보를 편애하기 때문이다. 뇌는 주의를 이끈 정보에게는 에너지를 아낌없이 전해주지만, 나머지 정보에는 에너지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5)

문제는 ADHD인들의 뇌에서 이 ‘가중치 배분’이 삐걱댄다는 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어보자면, ADHD인들의 뇌는 어떤 정보가 중요하든 그렇지 않든 모두에게 같은 수준의 에너지를 공급하게 되는데, 이렇다 보니 결정적 정보가 잡음에 가까운 정보가 공정한 경쟁을 치르면서 지나치게 된다. 그러니까 ‘오탈자’라는 정보가 내 주의라는 필터링을 휘파람 불면서 태평하게 빠져나간 것이다(단,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필터링 실패’가 앞서 언급한 억제 조절 저하의 결과로서 일어난 현상이라는 점이다. 둘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두자).**




가짜 저주를 풀어낸 마법 같은 공부

여기까지 공부해보니 ADHD 때문에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에 태풍이 들이닥친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을 뺀 세상 모든 사람이 ADHD를 ‘집중력 부족’으로 알고 있고 나도 그렇게 믿어 왔는데, 그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니 치아에 김 묻은 줄도 모르고 건치 미소를 짓는 친구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든 것이다. ‘집중력을 빼앗긴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매할 준비까지 했는데, 정말 악마가 나타나서 뒤도 보지 않고 영혼을 팔았다면 ADHD가 내린 저주는 우스운 수준 아니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이라도 집 나간 일도 없는 집중력에게 제발 돌아와 달라며 물 떠놓고 기도할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더불어서, 뭐라도 제대로 시작해볼 여지가 조금씩 보이기도 했다. 이러고 보니 태풍이 갑자기 소멸한 기분까지 들었다(뭔가 ADHD다운 소멸 같긴 하지만, 현실에선 잔뜩 겁만 주다 소멸하는 태풍도 여러번 왔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위의 과학적 설명들을 곱씹어 보니 나의 뇌가 나 모르는 사이에 세상 모든 정보를 다 빨아들이겠다는 마음 먹었다는 뜻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혹시 내 집중력이 ‘과해서’ 문제였던 건 아닐까?

돌이켜 보니 짐작에 들어맞는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일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내 책장엔 추리/범죄소설을 시작으로 한국문학, (세계문학전집 같은) 해외문학, 인문, 과학, 미학, 경제, 재테크까지 오만 장르의 책들이 혼돈을 이루고 있는데, 내가 쌓은 지식의 세계가 아주 넓지만 하찮도록 얕은 것도 너무나 타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나쁘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가족이나 친구 앞에서 어설프게나마 아는 척을 하며 관심도 받아보았고, 지인들 사이에서 나름 ‘글 잘 쓰는 사람’ 소리 들은 것도 잡스런 지식에 큰 빚을 지고 있으니까.

실제로 소아 및 성인 정신과 전문의이자 ADHD 이해 확산에 크게 기여한 에드워드 할로웰은 자신의 저서 『ADHD와 사이좋게 지내기』에서 “우리 ADHD 뇌는 페라리 엔진을 갖추고 있으나 자전거 브레이크만 달려 있으므로”, “창의적인 충동성의 순간까지 (자전거 브레이크를) 강화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6) 그럼 이 이야기를 ‘억제 조절 저하’와 연관지어볼 수는 없을까? 한편 같은 책에서 창의성의 비결로 ‘무의식 믿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여러분의 무의식이 창조한, 독창성과 비전의 세상에 들어가는 방법은 통제를 내려놓”음으로써 “상상력의 특별실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하는데,7) 여기에서 ‘필터링 실패’를 떠올리면 조금 억지스러울까?

이제 와서 ‘억제 조절 저하’나 ‘필터링 실패’를 장점처럼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니, 내 입장에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럴 수가 없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동안 내가 본 손해가 얼마인데 이걸 긍정하겠어! 다만, 맥락에 따라 비용이었던 특성이 자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빛과 어두움이 있는 것처럼.

게다가 내 입장에서 이런 ‘생각의 전환’이 정말 중요한 터닝포인트로 다가왔다. 엉뚱한 ‘집중력’만 쫓아다니는 동안에는 긍정 사고가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내린 줄도 몰랐던 지독한 저주에 걸려 있었고, 지금 이런 내 모습이 치유를 향한 단서로 바꿔 생각한 후에야 저주에서 풀린 것이다.

그렇게 어렵던 ‘시작’도 해보았고, 지독한 저주까지 풀어냈으니 멈출 이유가 없었다. ADHD를 정복하러 여기까지 왔으니, 못 먹어도 어디가 됐든 계속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주석

* 내가 해석을 멈추고 담당자에게 확인을 받았다면 잘못된 사실이 보고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 단, 오탈자 누락은 필터링 실패 외에도 (1) 지속적인 주의 유지, (2) 작업기억 및 모니터링 등이 섞여 발생하는 실수이며, 이후에 추가 설명을 덧붙일 예정이다.




참고문헌

1) Welsh, M. C., & Pennington, B. F., Assessing frontal lobe functioning in children: Views from developmental psychology. Developmental Neuropsychology, 1988

2) 위와 같은 문헌

3) 서보경, 성인 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ADHD)환자의 실행기능 연구, 한국심리학회지: 일반, 2012

4) Michael K Scullin, Julie M Bugg, Mark A McDaniel, Whoops, I did it Again: Commission Errors in Prospective Memory, Psychol Aging, 2011

5) R Desimone 1, J Duncan, Neural mechanisms of selective visual attention, Annu Rev Neurosci, 1995

6) 에드워드 M. 할로웰, 『ADHD와 사이좋게 지내기』, 시그마북스, 2024

7) 위와 같은 책



https://brunch.co.kr/brunchbook/pandad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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