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ADHD의 브레인 튜닝로그 #2-4
#2~#4까지 이어진 Part 1을 뒤로하고, Part 2가 시작됩니다. Part 1에서 ADHD 진단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펼쳐 보여드렸다면 이 장에서는 ADHD인으로서 제가 해낼 수 없던 일들과 그 이유에 대해 탐구한 것들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이 장은 단순한 과학 지식의 나열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게으름’이라는 혐의로 몰아세웠던 지난 세월을 향한 ‘무죄 증명 보고서’입니다. 혹시 다른 ADHD인이 이 글을 읽는다면, 뇌 구조와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여정을 통해 자신을 향했던 가혹한 오해를 멈추고 비로소 스스로와 화해하는 시간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판다 대리. 원고는 다음주 수요일까지 전달 부탁해요.”
“네, 일정에 여유가 생기면 초고를 먼저 전달 드리겠습니다.”
“어휴, 그렇게 해주시면 저희는 너무 감사하죠!”
⠀
대행사 선정 후 우리와 첫 번째 작업을 함께 한 광고주 담당자는 다소 들떠 있었다. 첫 번째 홍보 책자의 결과물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담당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광고주의 홍보 담당 임원에게 꽤나 후한 칭찬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실 몰랐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내 어깨가 들썩이고 있더라.
⠀
이 분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의욕은 들썩인 어깨보다 높이 솟아올랐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봤지?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고 한 마디씩 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약속할 일이 있으면 일단 모두 약속하고 봤다. 의욕이 이렇게 넘쳐흐르는데 일주일은 너무 긴 것 같지 않아?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고는 A4용지 첫 장 열 줄에서 제자리걸음을 반복했고, 나는 썼다 지우길 반복했다. 다행히(?) 광고주 담당자는 다른 업무로 무척 바빠지는 바람에 원고 마감 일정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유가 있던 원고 마감 일정은 한쪽 구석에 밀어 두었던 모양이다. 그 후로도 꽤나 오랫동안 담당자는 원고를 찾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원고 초반에 머물러 있었다.
⠀
그때만해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방향만 원하는 대로 잡히면 귀신에 홀린 듯 원고를 써내려가곤 했는데, 이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어떻게 고민 없이 좋은 글을 쓴다는 건가 싶었던 것이다. 그땐 새까맣게 몰랐다. 믿는 구석이 아니라 발등 찍는 도끼였다는 것을.
⠀
“판다 대리? 원고가 왜 이렇게 안 와요? 늦어도 월요일에는 내지 시안을 보고 싶은데!”
⠀
원고를 미루고 또 미루던 어느 날, 촬영 때문에 만난 광고주 김 과장은 내게 정색을 하며 물어왔다. 내가 작성해야 하는 10개의 원고 중 완성된 건 3개뿐이었다.
⠀
“아, 그게… 이번주 내로 작성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대체 뭐 했어요? 시간이 그렇게 많았는데.”
“……”
⠀
그 와중에도 나는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게 이 상황의 ‘킬포’였다. 하지만 (그리고 다행히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회사에 돌아와야만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아니다. 사실 믿을 만한 도끼도 아니었는데 함부로 휘두르다 사단이 난 것이다.
⠀
결국 그 주에는 새벽까지 야근을 하며 부랴부랴 원고를 써냈고, 내지 시안 작업은 담당자가 확인을 요청한 그 시점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손 빠른 디자이너 덕분에 일정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
“판다 대리님, 고생하셨어요. 이번에도 책이 잘 나왔다고 내부에서 평가가 아주 좋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도 정말 많으셨어요!”
⠀
하지 않아도 될 기나긴 고생 끝에 완성된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담당자는 머리가 아니라 손가락에 모터 달고 써낸 원고를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했다. 담당 임원도 만족스러워 했다는 후문까지 덧붙인 걸 보면, 지어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
하지만 회사는 내 문제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광고주 2~3개를 담당해야 할 녀석이 저렇게까지 헤매는 걸 보면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던 거다. 내 상태도 그들의 불안을 부추겼다. 그때 나는 의자 위에 얹어놓은 액체 슬라임일 뿐이었으니까. 회사와 나 모두 내가 잠시 멈춰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
⠀
그 즈음 ‘번아웃’에 관한 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나도 이 녀석을 유력 후보로 꼽았다. 이후 우울증 치료와 상담을 통해 정서적 탈진에서 어느 정도 회복했고, ‘완벽주의*1) 를 버리라’는 상담 선생님의 조언을 되새기면서 ‘나쁜 버릇’을 천천히 바로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로워졌을 땐 마감을 넘긴 게 언제적 일이냐는 듯 혼자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다.
⠀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마케팅/광고 분야로 전직하면서 ‘마케터’ 직함을 얻고 나서는 다 고친 줄 알았던 ‘나쁜 버릇’이 점점 자라기 시작했고, 제안서처럼 중요하고 난이도 높은 일을 맡을 때면 시작을 못하는 버릇이 심각해졌다. 일을 미루고 미루다 폭망의 경계선을 넘나들기를 반복하면서 다시 번아웃이 찾아왔고,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
이제 막 오픈한 가게 앞 풍선 인형처럼 쓰러지다 바로 서기를 1037번쯤 반복하다가 바람이 완전히 빠질 즈음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의자 위의 슬라임이 되어야 하는 걸까? 세상에 저주라는 게 진짜 존재하는 걸까? 이 의문이 머리를 넘어 가슴까지 짓누를 무렵 ADHD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저주를 풀어가듯 ADHD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깨달음이 작은 조각으로 하나씩 내 앞에 놓이기 시작했다.
⠀
가장 먼저 다다른 깨달음은 ADHD인들의 뇌 활성화 메커니즘이 다르기 때문에, 적절한 개입이 없으면 ‘업무 시작이 매우 어렵다’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조리극의 이해 못할 대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이니 잠시 의심을 거두고 잠깐 과학 이야기를 들어보시기를.
⠀
⠀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하면,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PFC)을 중심으로 한 집행 기능 회로에서 신호가 발생한다. 집행 기능, 만족 지연, 장기 계획 등 흔히 ‘이성의 영역’이라 불리는 고차원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다. 이렇게 생성된 ‘결심’이라는 소프트웨어 신호는 행동의 집행관인 ‘기저핵(Basal Ganglia)’으로 전달된다.
⠀
이해하기 쉽게 자동차 시동에 비유해보자. 운전자가 시동 버튼(전전두피질의 결심)을 누르면, 그 신호는 엔진을 최초로 회전시키는 ‘스타트 모터(기저핵)’로 전달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신호를 받아 엔진을 실제로 돌아가게 하는 모터의 ‘토크(회전력)’이지, 버튼을 반복해서 누르는 운전자(의지)가 아니다. 그런데 ADHD인의 뇌를 구조적 MRI 연구들을 종합한 메타 분석에 따르면(Gallo & Posner, 2016), 기저핵의 부피가 대조군에 비해 유의미하게 작은 것으로 관찰되었다. 행동의 동력을 생성하는 하드웨어가 평균보다 작게 설계된, 일종의 구조적 차이가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차이는 기저핵이 ‘시작’ 신호를 처리하는 효율이나 문턱을 높였을 것이다.2) 신경과학자들은 이를 ‘착수 결함(Initiation Deficit)’이라 부르는데, 기저핵이라는 문지기가 전전두피질의 ‘시작’ 신호를 통과시켜주지 않는 한, 운전자가 무슨 수를 차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법이다.
⠀
이 연구를 앞의 에피소드에 대입해보니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전전두피질은 매일 같이 수만 번씩 시동 버튼을 눌러댔지만, 내 머릿속 스타트 모터는 엔진을 깨우기에 턱없이 작은 출력을 내보내며 헛돌고 있던 셈이다.
⠀
⠀
다음은 ‘도파민(Dopamine)’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신경전달물질의 대표 선수 도파민의 대표적인 역할은 ‘보상’과 관련이 있다. 섹스나 음식, 조금 나아가 돈과 같은 자극이 주어지면 복측피개영역(Ventral Tegmental Area, VTA)의 뉴런이 활성화되면서 도파민이 분비된다.3) 우리가 섹스나 식사를 ‘기분 좋은’ 행위로 느끼는 이유는 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것이 전부였다면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겠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로버트 새폴스키가 쓴 벽돌책 『행동』에서 소개한 실험을 살펴보자. 이 실험에서 원숭이가 레버를 10번 누르면 연구자는 그 보상으로 건포도 한 알을 던져주었는데, 실험이 반복되면서 흥미로운 사실이 관찰되었다. 레버를 누르기 전부터 원숭이의 뇌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걸 달리 해석하면, 보상 그 자체뿐 아니라 보상이 예측될 때에도 우리는 (만족에 가까운) 기대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다.4)
⠀
인류가 다른 종과 구별되는 점은, 다른 종들과 유사한 도파민 시스템을 가졌음에도 종종 만족을 (다른 동물이 느끼기에) 영원에 가까운 기간까지 지연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뇌가 보상 그 자체보다 보상에 대한 기대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즉, 도파민은 즉각적인 즐거움 그 자체라기 보다는 결과물을 향해 우리를 밀어붙이는 연료의 압력에 가깝다(대입을 위해 오랜 시간 공부하고, 멋진 몸매를 위해 수 개월 동안 식사량을 조절할 수 있는 이유다 5) ).
⠀
뇌의 연료 공급원인 복측피개영역(VTA)에서 분비된 도파민 신호는, 신경 회로를 통해 복측 선조체(Ventral Striatum)로 전달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보상의 가치를 계산한 후, 행동을 개시할 만하다고 판단을 끝내야6) 사람은 비로소 노트북 앞에서 일을 시작할 에너지를 얻게 된다.
⠀
반면, ADHD인의 뇌는 예측의 순간 침묵하기 시작한다. 앞서 소개한 연구(Gallo & Posner, 2016)는 이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ADHD인들은 실제로 보상을 받았을 때(수령) 남들과 똑같은 뇌 반응을 보이지만, 보상을 기다리며 행동을 준비하는 단계(예측)에서는 복측 선조체의 활성도가 눈에 띄게 낮았다.
⠀
다시 연료 비유를 가져와보면, ADHD인들의 뇌 속 연료 펌프에서 충분한 압력을 만들지 못하면서 엔진은 점화 플러그의 불꽃조차 튀기지 못했다. 다시 말해 나에게는 원고를 마감하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그 마음을 행동으로 바꿔줄 압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공부가 여기에까지 다다르니 지난 날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지갑 여는 것보다 더 자주 결심했던 나는 얼마나 헛심을 쓰고 있던 걸까?
⠀
⠀
그런데 내 ‘시동’이 안 걸리는 데에는, 엔진(도파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4에서 언급한 기본모드네트워크(DMN)와 작업모드네트워크(TPN)의 관계 또한 시작을 방해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DMN과 TPN은 각각 휴식기와 특정 작업에 집중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인데, 업무를 시작하면 보통 사람들의 뇌에선 TPN의 활동이 우세해지면서 DMN 활동은 감소하게 된다. 신경과학자들은 이를 ‘반상관 관계(anti-correlation)’라고 부른다(기억해야 할 것은 DMN은 완전히 꺼지는 스위치가 아니라, ‘소음’처럼 늘 켜져 있는 배경이라는 점이다. 즉, DMN은 휴식시간이 끝나도 활동이 멈추지 않는다).
⠀
문제는 ADHD인들의 뇌에서 반상관 관계가 약화되는 경향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뇌 메커니즘 때문에 ADHD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그중 하나가 이번 파트에서 다룬 ‘업무 시작의 어려움’이다. 게다가 이 빈약한 반상관 관계는 일의 시작 외에도 너무나 많은 곳에 지뢰를 심어 두었다. 수업 중의 공상 여행, 사라지는 기억, 자꾸만 틀리는 계산까지…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6에서 해보도록 하자.
⠀
⠀
평소에 추리/범죄소설을 즐겨 읽던 나는, 여기까지 ADHD를 공부하고 나니 마치 ‘해리 보슈’**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 단서 없이 맨땅에서 수사를 시작했지만,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끝에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느낌이었던 탓이다. 한편으로는 추리/범죄소설이라면 반드시 등장하는 맥거핀이 떠오르기도 했다.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진행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지만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극적 요소. 내 경우에는 ‘의지(력)’가 맥거핀 역할을 맡은 셈이다. 범인(ADHD)은 애먼 데 있었는데, 평생 엉뚱한 녀석을 쫓아다녔으니까. 반박 불가할 정도로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에 조금 허탈해지기도 했다.
⠀
하지만 이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따지고 보면 영원히 불가능할 줄 알았던 ‘첫 걸음’을 이렇게 내딛은 셈이니까. ADHD 얘 뭐지? 병 받고 약 받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끝까지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과학의 힘을 꽤나 굳게 믿는 편인데, 과학적으로 원인이 명확하니, 솔루션도 명확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 나를 그토록 괴롭혀 온 일곱 범인 중 시작은 처리했고 이제 다음 여섯 녀석들을 처리하러 가보자. 내 발걸음도 왠지 경쾌해지는 기분이다.
주석
*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완벽주의란,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 자체를 심각한 자기 가치의 위협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 미국의 범죄소설가 마이클 코넬리가 내어놓은 ‘해리 보슈 시리즈’의 주인공. 독단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과 불화하지만, 사건 해결에 대한 사명감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인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결국 사건을 해결해낸다.
참고문헌
1) Paul L. Hewitt, Gordon L. Flett, 「Perfectionism in the Self and Social Contexts: Conceptualization, Assessment, and Association With Psychopatholog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991
2) Eduardo F Gallo and Jonathan Posner, 「Moving towards causality in attention-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overview of neural and genetic mechanisms」, Lancet Psychiatry, 2016
3) 로버트 새폴스키, 『행동』, 문학동네, 2023
4) 위와 같은 책
5) 위와 같은 책
6) https://en.wikipedia.org/wiki/Striat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