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해서 공부한 ADHD의 뇌과학 - #1.3
“판다 대리. 원고는 다음주 수요일까지 전달 부탁해요.”
“네, 일정에 여유가 생기면 초고를 먼저 전달 드리겠습니다.”
“어휴, 그렇게 해주시면 저희는 너무 감사하죠!”
대행사 선정 후 우리와 첫 번째 작업을 함께 한 광고주 담당자는 다소 들떠 있었다. 첫 번째 홍보 책자의 결과물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담당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광고주의 홍보 담당 임원에게 꽤나 후한 칭찬을 받은 모양이었다. 담당자와 임원 모두 내 원고를 좋아했다. 가끔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칭찬을 남발했는데, 기분이 나쁠 일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사실 나도 몰랐는데, 어깨가 들썩이고 있더라.
이 분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좋은 분위기인데, 어떻게 놓칠 수가 있을까. 의욕은 들썩인 어깨보다 높이 솟아올랐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봤지?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광고주에겐 월급 빼고 뭐라도 퍼주고 싶었던 나는 약속할 일이 있으면 일단 모두 약속하고 봤다. 의욕이 이렇게 넘쳐흐르는데 일주일은 너무 긴 것 같지 않아?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고는 A4용지 첫 장 열 줄에서 제자리걸음을 반복했고, 나는 썼다 지우길 반복했다. 다행히도(?) 광고주 담당자는 다른 업무로 무척 바빠지는 바람에 원고 마감 일정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음 책 출간까지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아 있다 보니, 여유가 넘쳐 흐르는 원고 마감 일정은 한쪽 구석에 밀어 넣어둔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꽤나 오랫동안 담당자는 원고를 찾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원고 초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만해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방향만 원하는 대로 잡히면 귀신에 홀린 듯 원고를 써내려가곤 했는데, 이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어떻게 고민 없이 좋은 글을 쓴다는 건가 싶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새까맣게 몰랐다. 믿는 구석이 아니라 발등 찍는 믿는 도끼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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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 대리? 원고가 왜 이렇게 안 와요? 늦어도 월요일에는 내지 시안을 보고 싶은데!”
원고를 미루고 또 미루던 어느 날, 촬영 때문에 만난 광고주 김 과장은 내게 정색을 하며 물어왔다. 내가 작성해야 하는 10개의 원고 중 완성된 건 3개뿐이었다.
“아, 그게… 이번주 내로 작성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대체 뭐 했어요? 시간이 그렇게 많았는데.”
“……”
그 와중에도 나는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게 이 상황의 ‘킬포’였다. 하지만 그 변명마저 담배 연기처럼 머릿속을 흩날릴 뿐이었고,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회사에 돌아와야만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아니다. 사실 믿을 만한 도끼도 아니었는데 함부로 휘두르다 사단이 난 것이다.
결국 그 주에는 새벽까지 야근을 하며 부랴부랴 원고를 써냈고, 내지 시안 디자인은 담당자가 보여달라는 그 시점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손 빠른 디자이너 덕분에 일정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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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 대리님, 고생하셨어요. 이번에도 책이 잘 나왔다고 내부에서 평가가 아주 좋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도 정말 많으셨어요!”
기나긴 (하지 않아도 될) 고생 끝에 완성된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담당자는 머리가 아니라 손가락에 모터 달고 써낸 원고를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했다. 담당 임원도 만족스러워 했다는 후문까지 덧붙인 걸 보면, 지어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회사에서 내 문제를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광고주 2~3개를 담당해야 할 녀석이 저렇게까지 헤매는 걸 보면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던 거다. 내 상태도 그들의 불안을 부추겼다. 그때 나는 의자 위에 얹어놓은 액체 슬라임일 뿐이었으니까. 회사와 나 모두 내가 잠시 멈춰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시작을 못하는 버릇 때문에 코너에 몰린 나는 이게 정신과적 병리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까지 있는 힘을 다해 습관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방향을 바꿔서 ‘시작 공포증’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찾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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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것은 ‘번아웃’이었다. 2010년대 중반 즈음 ‘워라밸’과 ‘번아웃’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요점은 휴식 없이 일을 한다면 당장 느끼진 못하더라도 어느 순간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마저 소진되어 버린다는 이야기였다. 이건 100% 내 이야기이기도 했는데, 좀처럼 끝까지 미루다 밤을 반복해 세웠던 건, 마치 멈춰 있던 포르쉐가 회전수를 최대한 끌어 올려 제 시간에 도착하는 격이었다. 포르쉐는 그나마 내구성이라도 좋았지, 내 몸과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이다.
또 다른 용의자는 ‘완벽주의’ 였다. 나는 업무 하나를 시작할 때 결과물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는데, 대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기사 같은 걸 떠올렸고, 그 완벽한 기사를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했다. 문제는 그 고민을 마감 하루이틀 전까지 이어갔다는 거다. 그때는 그저 미리 처리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해 고생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생각도 못한 반전이 있었다.
“판다 씨는 완벽주의를 버려야 해요.”
시작 공포증을 비롯해, 한창 우울증의 늪 한가운데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상담 선생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당연히 납득할 수 없었다. 내 결과물은 전혀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진 선생님의 설명에 나는 결국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완벽주의는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에 도달 못할 가능성 자체를 위협으로 해석하는 경향이었다.1) 과연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과제를 앞에 두고 난 언제나 회사를 놀래킬 기획안을, 독자의 코끝을 울리는 기사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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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진단과 처방은 정답도 오답도 아니었다. 나는 정말 비효율적으로 지치고, 꿈이 너무 커서 일상 업무조차 시작할 엄두를 못 냈으니까. 상담을 통해 완벽주의의 철벽을 서서히 무너뜨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고 한편을 마법처럼 써냈다. 자연스럽게 비효율도 사라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케팅/광고 분야로 전직에 성공한 나는 다시 시작 공포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전직엔 성공했지만 적응은 만만치 않았고, 충분히 걷어낸 줄 알았던 결과물에 대한 걱정이 안개처럼 시야를 가려버렸다. 그렇게 시작 공포증은 만성이 됐고, 나는 업무가 됐든 브런치 글이 됐든 큰 마음을 먹어야만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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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시작 공포증은 높은 확률로 동료 ADHD인들에게도 트라우마를 함께 안겨준 것 같다. 실제로 ‘미루기’는 (적어도 내가 살펴본) 대부분의 ADHD 서적들은 시작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러셀 램지(J. Russel Ramsay)와 안소니 로스테인(Anthony L. Rostain)은 함께 쓴 『성인 ADHD의 대처기술 안내서』의 경우, 서론 첫머리에서부터 “ADHD 성인들이 하려고 했던 일을 왜 하지 못하는지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우리가 잘 하는 것 같습니다”2)라며 미루기를 ADHD의 핵심 증상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우리의 뇌는 무슨 일이든 ‘일단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거나(부족한 동기부여)3), “완벽을 위한 노력이 여러 차례 실패하고 나면 (중략) 의욕이 불타오르기보다는 불가능을 좇는 상태에 갇혀버리”는 등(완벽주의)4) 사방에서 ADHD인들의 시작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우리 ADHD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끙끙 궁리를 하다 보니 제일 먼저 ‘그 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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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작 공포증’이라고 이름 붙인 증상, 그러니까 시작을 어려워하는 증상은 사실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고,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관련해서 제일 먼저 떠올릴 만한 것은 아마도 도파민(Dopamine)일 것이다.
지난해에 너도 나도 “도파민 터진다”는 밈을 이야기하면서 ‘행복 호르몬’으로 단단히 오해를 받았지만, 사실 도파민은 행복 그 자체보다는 ‘보상’, 나아가 ‘보상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브라이언 넛슨(Brian Knutson)은 보상을 기대하는 사람에게서 뇌의 보상 회로, 특히 측좌핵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확인했는데,5) 영장류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로버트 새폴스키는 넛슨의 연구 결과를 도파민 경로의 작동으로 해석한다. 즉 보상을 ‘상상하기만 해도’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것이다.6)
이 같은 도파민 메커니즘은 이 장의 주제인 시작(정확히는 행동 동기)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식사를 떠올리기만 해도 쾌감을 느낀다면 실제로 식사를 하고 싶어지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아가 도파민이 시작과 관련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도파민 분비 시스템에 문제가 있을 것이란 추론해볼 수 있을 텐데, 실제로 많은 ADHD 서적에서 할 일 미루기의 원인으로 도파민 부족을 언급하고 있으며 학계에서 ADHD가 도파민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7)
문제는 ADHD인들의 도파민 시스템이 단순한 부족이나 과잉이 아닌, 상황에 따라 불균형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8) 많은 신경과학자들과 임상의들은 ADHD를 ‘집중력 부족’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다. 병명에 포함된 결핍(Deficit)이란 말 때문에 많은 이들이 ADHD를 ‘인지 장애’로 오해하지만, 사실은 ‘주의력 조절’의 어려움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9)
가령 내 경우에는 어떤 일에 대한 몰입(시작)이 어려운 만큼 가끔은 몰입에서 빠져나오기가 대단히 힘들었다(지금 이 글을 쓰면서 5시간째 의자에서 일어서지 않는 중이다. 그 사이에 웹서핑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임상 현장에 따르면 많은 ADHD인들에게서 나와 같은 과몰입 현상이 관찰되는데, 만약 ADHD를 집중력 부족 문제로 바라본다면 이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반대로 주의력 조절의 문제로 바라보면, ADHD인들의 과몰입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현상이 될 뿐만 아니라 ‘시작 공포증’ 또한 단순한 미루기 문제를 넘어 ‘전환의 어려움’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ADHD의 ‘시작 공포증’을 도파민만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결론에 다다른 나는 도파민 이상의 설명이 필요했고, 다시 한번 자료의 바다를 향해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 넓은 바다를 한참 돌아다니고 나서야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3/29 발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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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의학과 전문의이자 ADHD 임상의학의 권위자인 에드워드 할로웰(Edward M. Hallowell) 박사는 ‘인지 장애’를 암시하는 ADHD대신, 세 가지 핵심 특징, 즉 변동성(Variability), 주의력(Attention), 자극 추구(Search for Stimulation)를 결합해 ‘변동성 주의력 자극추구 특성(Variable Attention Stimulation Trait, VAST)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안한다.(에드워드 할로웰, 『ADHD와 사이좋게 지내기』, 김부민 옮김, 시그마북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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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ul L. Hewitt, Gordon L. Flett, Perfectionism in the Self and Social Contexts: Conceptualization, Assessment, and Association With Psychopatholog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991, Vol. 60, No. 3, 456-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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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러셀 램지·안소니 로스테인, 『성인 ADHD의 대처기술 안내서』, 한국성인ADHD 임상연구회 옮김, 하나의학사, 2019, 34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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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메러디스 카더, 『나는 내가 고장 난 줄 알았다』, 이진 옮김, 수오서재, 2025, 109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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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의 책, 220~221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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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Knutson, B. et al., Anticipation of Increasing Monetary Reward Selectively Recruits Nucleus Accumbens, J Neurosci. 2001 Aug 15;21(16):RC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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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로버트 새폴스키, 『행동』, 김명남 옮김, 문학동네, 2023, 89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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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Faraone, S. V., et al., The World Federation of ADHD International Consensus Statement: 208 Evidence-based conclusions about the disorder, Neurosci Biobehav Rev. 2021 Sep:128:789-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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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황희성, 『아무도 모르는 나의 ADHD』, 어깨 위 망원경, 2023, 100쪽에서 인용, 도파민 시스템 불균형에 관한 학술적 근거는 Faraone et al.(202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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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Ashinoff, B. K., Abu-Akel, A., Hyperfocus: the forgotten frontier of attention, Psychol Res, 2021 Feb;8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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