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워크숍을 디자인하고 진행하는 것이 업으로 삼고 있는 퍼실리테이터인 나는 워크숍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다양한 CEO들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다. 특히 회사 전체의 비전이나 사업전략을 도출하는 워크숍인 경우, 사전 인터뷰와 워크숍 현장에서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의 CEO와 임원진들의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10년 넘게 이 일을 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CEO는 외국계기업 T사의 미국인 대표이사였다. 업계 타 회사에 계시다가 새롭게 부임하신 CEO는 전사의 비전을 새롭게 만들고자 하셨고, 인터뷰에서 뵌 모습은 다정다감하면서도 날카로운 사업적 통찰력을 가진 이미지였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왜 비전을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 하시는 지, 또 본인이 생각하는 비전은 무엇인지를 워크숍이 시작 될 때 밝혀 주십사 요청했다.
워크숍 당일 40여명의 임원진들이 강의장에 모였다. 공교롭게도 모든 참석자들은 평균나이 50대 초반의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이는 남성들 뿐이었다. 워크숍 시작을 알리고 대표님이 무대에 서시더니 한국어로 오프닝 스피치를 시작하셨다. 예의상 ‘안녕하세요’ 정도의 한국어가 아니라, 발음은 다소 불안정하긴 했지만, 천천히 한국어로 15분여간 한국어로 말이다.
외국계 기업의 경우 외국인 CEO나 임원들이 꽤 있어서 워크숍에서 자주 뵈었지만, 대부분 통역을 쓰거나 한국인 참석자들이 영어로 말을 해서 소통을 한다. 사전 인터뷰를 영어로 진행했을 때에도 단 한마디 한국어를 안 하셨기에, 나는 그야말로 깜짝 놀랬다. 신임 외국인 CEO로서, 노련한 임원들 앞에서 한국어로 오프닝을 하기 위해 얼마나 준비를 하셨을지를 생각하니, 그 정성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참석자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미소를 지으면서 오프닝 스피치를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미국인 CEO의 가장 멋진 점은 오프닝 스피치를 한국어로 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오프닝 스피치에 담긴 그 내용이, 내가 지금껏 들었던 비전 워크숍에서의 오프닝 중에 단연 최고였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 업계는 그동안의 정체기를 지나, 앞으로 빠르게 성장할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5년 안에 2배 성장을 하지 못한다면, 리더들의 잘 못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5년후 2배 성장을 비전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성장을 하려면 그에 필요한 전략과 자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전략과 자원이 있으면 2배 성장을 할 수 있는지 오늘 워크숍에서 모두 꺼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오프닝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투자를 하면 1-2년 동안은 손익에 영향을 받아서 본사로부터 제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CEO로써 그것을 충분히 감내하고, 우리 회사가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미래에 투자하겠습니다” 라고 덧붙이셨다.
또박또박 천천히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해서 설명하는 내용이 모든 참석자들에게 전달되어 마음을 움직였었던 것일까…그날 하루의 짧은 워크숍은 말 그대로 물 흐르듯이 흘렀고, 워크숍이 마무리 될 즈음에는 직원들과 공유 할 깊이 있는 비전 내용이 모두 정리가 되었다.
CEO의 말에 담긴 통찰력과 솔직함, 그리고 그것을 영어로 들을 준비를 하고 있던 참석자들에게한국어로 말함으로써 50살 넘은 중년 남성들을 무장해제 시켜 버린 멋진 CEO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