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근사한 순간

주말을 시골집에서 보내는 좋은 점은 계절이 다른 계절로 넘어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쨍한 사계절이 아닌 다른 계절이 들어서는 순간들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겨울에서 봄으로, 냉이 된장국

토요일 아침이면 늦잠의 유혹을 떨치고 새벽 6시면 일어나 길을 나선다. 한시간 남짓을 달려 홍천 집에 도착하면 남편은 영역확인을 하듯 밭을 샅샅이 돌며 이것저것 살피고, 나는 서둘러 쌀을 씻어 백미찰진밥을 앉힌다. 쌀뜨물을 받아 된장을 풀어 놓고, 밭에 나가 냉이를 한 줌 캔다. 어느새 푸석푸석해진 땅으로 호미가 쑥쑥 들어간다. 긴 냉이 뿌리들이 세상 밖으로 뽑혀 나오며 향기로 소리를 지르는 듯하다. “미안해, 다음 생에는 큰 나무로 태어나서 오래 살아라” 갑작스럽게 따뜻해진 날씨에 일찍 머리를 내민 표고버섯 서너 개를 따서 넣고, 두부 한 모를 툭툭 썰어 넣으면 뚝딱 냉이 된장국이다.


따뜻한 흰쌀밥에,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땅에 있었던 냉이로 끓인 된장국에 김치 하나. 이렇게 소박한 아침 식사가 한주동안 소란스러운 세상에 있었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추운 강원도 홍천은 4월초가 되어야 냉이에 꽃이 피는데, 그 꽃이 피기전에 냉이 된장국을 끓여야 뿌리가 뻐세지 않고 맛있다. 아직 바람은 차지만 햇볕은 따뜻한 초봄에는 양지바른 곳에 보드라운 풀들이 머리를 먼저 내밀고, 작은 꽃들을 피운다. 농사꾼에게 잡초는 오랑캐처럼 지겹고 미운 놈들이지만, 겨울 끝자락에 땅을 뚫고 올라오는 이 여린 애들은 장화 신은 발로 밟을 새라 피해서 걷게 된다.


봄에서 여름으로, 개구리와 소쩍새

한여름이 다 되어서야 싹이 나는 대추나무를 빼고 산천의 모든 나무들이 초록 잎으로 너울거리고, 모를 심어 놓은 논에 물이 찰랑거릴 때쯤이면 여름이 한발 쓱 담을 넘는다.


하루 종일 그늘과 밭을 오가며 땀 흘리고 일한 뒤 늦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누으면, 수천 마리의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가 창을 넘어 들어온다.


그 소리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듣겠다고 데크에 텐트를 친다고 부산을 떤다. 박자도 화음도 없이 수천 마리의 개구리가 동시에 개굴개굴 소리를 내지르는데도, 묘한 어우러짐으로 초여름 밤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뒤늦게 시작되는 소쩍새의 소쩍소쩍.


초저녁에만 우는 개구리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골아 떨어지기도 하지만, 소쩍새는 늦게까지 남아서 개구리들이 다 들어가고 난 뒤에도 한참을 소쩍소쩍 밤하늘을 지킨다. 찜통 같은 여름이 오는 것은 달가울 것 하나 없지만, 그나마 열흘쯤 이어지는 이 개구리와 소쩍새의 이중창 덕분에 여름이 마저 한발을 내딛도록 문을 활짝 열어둔다.


여름에서 가을로, 호박 잎 쌈밥

이 세상 농작물은 여름에 수확하는 것과 가을에 수확하는 것으로 나뉜다. 참깨는 5월 더위가 시작될 때 씨를 뿌려서 8월 중순에 수확을 하고, 들깨는 옥수수 벤 자리에 모종을 심어서 가을에 거둬들인다. 찐 여름에 거둬들이는 참기름이 선선한 가을에 수확하는 들기름 보다 배나 비싼 것은 당연한 이치다.


처음 참깨를 심던 3년 전, 남편과 참깨를 심으며, 이왕이면 많이 심어서 이사람 저사람 나눠주자 했다. 그런데 머리가 벗겨지게 더운 8월 중순, 하나씩 벌어진 참깨가 떨어질 새라 조심스럽게 베어서 하나하나 잎을 따내고, 곱게 묶어 세워 두기까지…새벽 6시에 시작해서 밤 8시까지 허리가 꺾어지도록 일을 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처음엔 회사 동료들은 빼자 했다가, 친정에만 주자 했다가, 나중엔 우리만 먹고, 참깨는 ‘힘든 것을 잊을 만하면 3년에 한 번만 심자’로 바뀌었다. 올해가 3년 터울 참깨를 심는 해이다.


이런 지긋지긋한 긴 여름도 결국은 등 떠밀려 떠나게 되는 것이 계절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반가운 때. 호박 잎이 제일 맛있어지는 때다. 토요일 아침 밭에 도착하자마자 여린 호박 잎을 따서 살짝 찌고 된장찌개를 앉힌다. 이때는 된장국보다는 이것저것 푸성귀들을 넣어 되직하게 끓인 된장찌개다. 데크에 앉아 호박 잎에 된장찌개 한술 떠서 밥에 싸 먹으며 봄부터 여름 내내 풀과의 전쟁을 치르며 지켜낸 작물들을 둘러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씩씩하게 자라나 우산처럼 잎을 피워낸 토란이며, 옆에만 가도 향을 내뿜는 생강, 찬바람이 불면 밀린 숙제를 하듯 열심히 열매를 맺혀내는 가지, 잘라도 잘라도 새롭게 자라나는 공심채, 남편이 유튜브를 100개쯤 보고 터득해서 키워내는 수박과 참외, 그리고 멀리서 하늘거리며 자라고 있는 들깨와 콩과 고구마. 여름내내 빨간 고추를 키워내느라 지쳐가는 고추 밭, 아직 애지중지 키워야 하는 김장 무와 배추까지.


우리가 주5일 도시에서 딴 짓 하는 동안 부모도 없이 홀로 크던 애들, 주말에 겨우 찾아와 키우고 거둬들인다.




가을에서 겨울로, 김장

11월 둘째 주 주말엔 1박2일 김장 캠프가 열린다. 총 네 가족이 총동원되는 김장. 사실 여름부터 고추를 말리고 닦고 빻고, 마늘을 까고 빻고, 소금을 사서 간수를 빼 두는 등 준비는 애진작에 되어왔다.


이날을 위해 키워둔 배추 120포기와 무 100여개를 수확하는 것으로 김장 캠프는 정식 시작되는데, 홍천팀은 수년간 손발을 맞춰온 정예 멤버들이 있다. 한 사람이 칼로 배추 목을 톡톡 치고 나아가면, 2인조가 뒤따르며 손수레에 담아서 수돗가로 모은다. 큰 배추는 4조각으로, 작은 배추는 2조각으로 자르는 칼재비는 아까 배추 목을 톡톡 잘랐던 사람이 맡는다. 홍천팀의 캡틴은 사실 소금재비인데, 15년 넘게 김장에서 소금물 농도를 맞춰온 남편이다. 처음엔 배추가 살아나서 밭으로 간다만다 하더니, 이제는 옆집 김장에까지 나서서 조언을 할 정도의 실력자가 되었다.


우리가 자는 동안 배추는 소금물 속에서 숨을 죽이며 밤을 보낸다. 그리고 새벽 5시반, 드라마 촬영에서나 쓸만한 서치 라이트가 깜깜한 동네를 깨운다. 장화까지 일체형인 어부용 멜빵 바지를 입고 모자를 쓴 완전무장을 한 4인조가 서치 라이트를 켜놓고 배추를 씻는다. 이때 허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허리가 나가기 마련인데, 일요일 오후에 배추를 버무리려면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난리 브루스를 쳐야 한다. 집으로 배추를 가져와 실내팀이 준비해 놓은 양념과 만나 버무리기를 또 몇시간, 각 집에서 가져온 김치통에 김치를 모두 채워 줄로 세우면, 8X4=32통이 장관이다.


김장도 끝나고, 추수를 끝낸 텅 빈 밭을 마주하고 앉아 커피를 마신다.


냉이 하나 캘 때에도 미안했던 봄의 마음이 오랑캐 같은 잡초들과 한여름 씨름을 하고 나니, 배추 모가지를 칼로 툭툭 잘라내는 사무라이가 되었다. 벌레들도 풀씨들도 흙을 덥고 겨울잠을 자러 가는 겨울, 바람만 분주히 오가는 텅 빈 밭은 이제 다시 낭만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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