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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현 Jun 03. 2021

어린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왜 좋아해요?

xx 씨는 ‘이 분야만큼은 내가 남들보다 잘 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뭐예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입사 면접에서 받은 질문이다. 이에 나는 “클래식 음악이요!”라고 답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예술이나 음악과는 하등 상관없는 분야의 취준생으로서 전혀 유리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대답이었던 것 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가 자신 있게 남들보다 잘 안다고, 아니, 잘 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할만한 것은 클래식 음악이 유일하다. 그런데 다른 음악 장르와는 달리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요? 대중음악이랑은 다른 무언가가 있나요?”


“언제부터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됐어요?”


“와, 요즘도 클래식을 듣는 사람이 있어요?”


대중음악이 주류 음악인 세상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일 수 있겠으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거의 클래식 음악만을 들어온 나로서는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악동뮤지션의 음악을 좋아해요’ 라거나 ‘아이돌 그룹 xx의 팬이에요’라는 말에는 제기되지 않을 의문이기도 하다. 과연 악동뮤지션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질문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보다 ‘어렵’고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전국 어디를 가도 상가 건물마다 음악학원의 간판이 적어도 하나씩은 붙어 있다는 점이다. 이 중 대다수는 정통 클래식 전공자들이 운영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 이런 학원에 매일매일 다닌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 비해 전반적인 클래식 음악 리터러시가 높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피아노 학원에 다녀본 사람들은 ‘체르니 몇 번’을 치는지가 피아노 실력의 척도로 흔히 사용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체르니 교본’의 ‘체르니’가 이 교본에 실린 연습곡들을 작곡한 작곡가의 이름이라는 것을, 또 체르니가 베토벤의 제자였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사실 체르니가 우리에게 “100번”, “30번”, “40번” 등으로 알려져 있는 연습곡들을 작곡한 이유는 자신의 스승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잘 치려면 꼭 필요한 기본기를 다져주기 위해서이다. 백 날 체르니 30번을 연습해봤자 베토벤 소나타를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 노력은 말짱 도루묵이라는 의미이다.


바이올린 진도의 척도로 사용되는 ‘스즈키 x권’도 마찬가지이다. 스즈키 1권 중에서도 첫 곡으로 배우는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이 사실은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에 대비하기 위한 연습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 외에도 스즈키 교본 전반에 바이올리니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작곡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흐의 음악을 잘 연주하기 위한 연습들이 다수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중 대다수는 피아노 학원에서 체르니 진도를 빼기 급급할 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가 어떤 곡들인지,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지, 어떤 배경에서 작곡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전혀 배우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교양을 더 쌓으라고 부모님께서 돈을 들여 보내주신 음악 학원에서, 우리는 ‘음악’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하고 리듬게임과 별 다를 것이 없는 ‘(심지어는 잘못된 타법의) 손가락 돌리기’만 하고 오는 실정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은 단순히 손가락을 잘 굴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확성과 더불어 톤(tone), 다이내믹(강약) 조절, 프레이징(phrasing, 음악에서 연속되는 선율을 악구 단위로 분절하여 연주하는 기법),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 악곡 전반에 대한 해석 등등이 모여 좋은 연주와 그다지 좋지 않은 연주를 구별 짓는다. 그리고 좋은 연주를 많이 하는 연주자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대중음악계의 비욘세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이런 위치에 있는 피아니스트로는 크리스티안 짐머만, 마르타 아르헤리치, 랑랑, 유자 왕, 또 한국의 조성진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수 존재한다. 나는 단지 아이유나 BTS보다 이런 이들의 연주에 더 많이 노출되었을 뿐이고, 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많은 한국인들이 클래식 음악을 즐길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모른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사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클래식 음악 속에서 살아가며 끊임없이 클래식 음악에 노출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세탁기는 세탁이 끝나면 슈베르트의 ‘송어 틀어주고, 중고생 영어 듣기 평가 중간중간에는 크라이슬러의 ‘아름다운 로즈마린 나온다. 또한 고전시대의 모차르트나 낭만시대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도 아닌 난해한 곡을 작곡하는 것으로 유명한 현대 음악 작곡가 라벨의 ‘볼레로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 삽입곡으로 기억하며 좋아하는 수많은 90 대생들을 보면 그들은 충분히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고 즐길만한 소양을 갖췄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소 피겨스케이팅을 좋아하지 않아도 김연아의 경기는 챙겨보고, 축구를  몰라도 박지성만은 자랑스러워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켜줄  있는 것이 바로 클래식 음악인 것이, 클래식 음악계만큼 한국인들이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곳도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전설적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정명훈, 정경화 남매는 물론, 조성진, 손열음, 최나경, 김봄소리, 임지영, 양인모 등등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신세대 음악가들이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고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활약을 보고 있자면 음악도 음악이지만 절로 애국심이 샘솟기 마련이다. 만약 여기까지 보고 한국 연주자가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을   들어보고 싶어졌다면 조성진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시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게 한국 연주자들의 연주부터 듣기 시작하면, 어느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클래식 음악 팬들, 연주자와 지휘자들, 그리고 작곡가들과 교감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장황한 글을 끝맺으며 짧게 덧붙이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다. 먼저 클래식 음악계가 그렇게 고리타분하지만은 않다고 해명하고 싶다. 300만 구독자를 보유한 클래식 음악+코미디 유튜버로 활동 중인 ‘twosetviolin’을 보거나 각종 소셜 미디어에 올라와 앗는 클래식 음악 밈(meme)을 보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는 것은 내 일상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 자체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만약 남들과는 조금 다른 취미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료 압박(peer pressure)이 심했던 어린 시절에는 나 역시 내가 또래들과는 조금 다른, 어르신들이 주로 가지고 있는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모난 돌이 되지 않기 위해 나를 꽁꽁 숨기던 때보다는 면접관 앞에서까지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고 밝힐 수 있는 지금의 내 자아가 훨씬 건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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