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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현 Aug 06. 202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제목이 시사하는 것과는 달리 인구 노령화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네오 웨스턴 (Neo-western) 스릴러 영화이다. 특이한 장르만큼이나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당으로 꼽히는 조커나 한니발과도 견줄만한 사이코패스 살인마 캐릭터 안톤 쉬거의 등장이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이 어려운 배역을 설득력 있게 연기하여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이 외에도 이 영화는 각 영화제에서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또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호평을 받는 여타 영화와는 달리 상업적, 대중적으로도 큰 히트를 쳤다.


그러나 나는 호평일색인 이 영화에 대해 다소 다른 의견을 개진해보고자 한다. 물론 영화가 재미없었다거나 작품성이 떨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극찬하는 리뷰는 이미 세간에 너무 많이 나와있기에, 영화를 보고 개인적으로 의아했던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대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무슨 뜻인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해 보인다. 철학적인 제목에 이끌려 영화를 보게 된 관객들은 자연스레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제목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이에 대해 멋진 해석을 내놓고자 이리저리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제목과 영화 내용 간의 연관성을 찾지 못해 인터넷 검색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검색해본 결과 생각보다 제목에 대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뜻은 즉, 영화에서 등장하는 것과 같은 잔인한 범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80년대 이후의 미국 사회가 영화 속의 보안관과 같은 ‘지혜로운 노인’이 살아가기에 부적합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을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영화는 전혀 범죄의 흉악함을 고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적 문제를 폭로하기는커녕 별 다른 이유 없이 살인을 즐기는, 그래서 위협적임과 동시에 매력적인 안톤 쉬거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하여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에 이용한다. 만약 정말 제목에 걸맞은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였다면 미국 사회에 흉악 범죄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이유를 파헤치거나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마약 거래 대금 도둑과 사이코패스 살인마 간의 추격전을 흥미진진하게 연출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 않았을까?


단순히 도덕성이 결여된 인물들과 그들이 벌이는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여, 그리고 할리우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치밀한 사이코패스 10위권 안에 들만한 자를 늙은 지역 보안관이 검거하지 못했다고 하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대단히 거창한 결론에 도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차라리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같이 장난스러우면서도 담백한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도덕적 딜레마


개인적으로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동전 던지기’를 통해 자신의 ‘먹잇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안톤 쉬거의 모습이었다. (앞으로 동전 던지기 내기를 할 때마다 그의 얼굴이 생각날 것 같다.) 그러나 모스의 아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게임을 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을 죽이기로 하든, 살리기로 하든, 그것은 쉬거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결국 쉬거는 모스의 아내를 자신의 결정에 의해 살해하는데, 사건 직후 그는 신호위반 차량에 치어 큰 부상을 입는 천벌을 받게 된다. 2시간 동안 전혀 도덕관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로 묘사되어온 자에게 갑자기 살인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는 아이러니는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서 해리가 자신에게 빙의한 볼드모트에게 “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른다”며 설교하자 볼드모트가 괴로워하며 해리의 몸에서 탈출한 장면보다도 조금 더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느껴졌다.


단순한 스릴러에 그치지 않고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와 보다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자 했던 코엔 형제의 노력은 굉장히 높이 사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조악하게 느껴지는 플롯이었다.


영화의 결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쉬거, 모스, 보안관 세 인물과 멕시코 갱단은 러닝타임 내내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인다. 그러다 모스는 ‘디파티드’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총에 맞아 죽었을 때만큼이나 허무하지만 그만큼 충격적이지는 못 하게 멕시코인들에게 모텔에서 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이로부터 마치 다른 영화처럼 분위기가 갑작스레 전환되며 보안관이 현대 사회에서의 자신의 역할과 앞으로의 운명에 대해 고찰하는듯하는 서사가 이어지는데, 약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를 본 뒤인지라 노인의 감정선이 와닿지는 못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긴장감이 풀리며 졸음이 쏟아졌다.)


고찰 끝에 보안관은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모두들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이 꿈 이야기가 대체 어떤 내용이며 무엇을 시사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는가? 이게 대체 무슨 뜬 구름 잡는 이야기란 말인가! 꿈 내용을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심오해서 해석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말이 되지 않아 해석이 불가한 것인지 잘 모르겠을 정도이다.




앞서 나열한 것들을 종합해보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한 내 불만사항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바로 ‘억지스러운 주제 의식’이다. 최근 몇 년간 ‘겟 아웃’이나 ‘기생충’과 같이 겉보기에는 단순히 자극적인 스릴러이지만 내용 전반에 심오한 주제 의식이 깔려 있는 영화들이 다수 나온 바 있다. 요즘은 이런 영화를 ‘소셜 스릴러’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이에 비해 2007년에 상영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세련미라든지 노련함이 떨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먼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시도가 있었기에 후에 소셜 스릴러 장르가 자리 잡을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2021년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소셜 스릴러’로서는 조금 아쉬운 작품이었지만, 단순 ‘스릴러’로서는 사운드트랙 하나 없이도 긴장감을 끌고 나갈 수 있었던 만큼 빼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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