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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 Apr 27. 2023

방송작가를 한 이유

미안하다, 나 자신! 하지만 자업자득인걸

예전의 난 글쓰기가 어렵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상도 꽤 많이 받아서 잘 쓰는 줄 알기도 했다. 장래희망에는 기자나 카피라이터를 적었다.


대학 시절, 진로를 결정한 친구들이 하나둘 입사하고 싶은 회사를 말할 때, 난 앞이 깜깜했다.

가고 싶은 회사는커녕

솔직히 꼭 하고 싶은 일도 없었으니까.


막연하게 글 쓰는 직종만 생각하다 택한 게 방송작가였다. 왜 기자나 카피라이터가 아니라 방송작가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몰라서'였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먼저 몰랐던 것 하나,

일 잘하는 것보다 선후배 관계가 더 중요한 바닥인 걸 몰랐다.


방송일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딱딱한 수직적 조직문화와 거리가 멀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방송작가는 대부분 고용이 불안정한 데다 인맥으로 채용된다.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부당한 관행 덕에 군대식 선후배 문화가 만연하다.


도제식과는 다르다. 가르쳐주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선배 행세 하려는 이들 얘기니까.


물론 케바케, 사바사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느지막이 출근해 자기 약속 시간 맞추려고 자리 지키고 있는 거면서 할 일 다 한 후배가 먼저 퇴근하는 꼴은 못 보는 선배가 세고 셌다.


복장의 자유? 자기 관리 잘하는 후배가 풀메에 힐 신고 출근한 거 보고 넌 꾸밀 시간도 있나 보다? 일이 할만한가 봐?라고 꼽주는 선배 얘긴 질리도록 들었고 아예 조연출 일까지 끌어다 주는 선배도 있었다. 그것도 선배라고 할 수 있다면.


이런 인간들은 방송계가 아니어도 존재하지만 방송작가는 대부분 프리랜서고 아직도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부당함을 말했다간 일자리를 잃을 수 있고, 일 잘하는 것보다 선배한테 잘하는 게 상위 능력인 바닥이란 걸  까맣게 몰랐다.


몰랐던 것, 둘

방송작가의 주 업무가 글쓰기가 아니란 걸 몰랐다.


물론 순수문학 작가처럼 글만 쓰진 않겠지만

그래도 주로 하는 일은 글쓰기일 줄 알았는데

냉정하게 말해 제대로 만든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원고를 쓰는 게 아닌 이상,

진짜 글을 쓰는 방송작가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교양 프로 vcr 내레이션 원고나

스튜디오 대본 쓰는 작가들 중에 의아해할 사람들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수긍할 거다.


우리의 글쓰기는 기존 글의 재구성 또는 답습에 가깝다. 방송작가의 다른 이름이 괜히 구성작가겠나.


글을 쓰지 않으면 뭘 한단 말인가?


일단 기획을 한다.

아이템 발굴 및 자료조사를 한다.

섭외 및 출연자 관리를 한다.

촬영 구성안과 원고를 쓴다.

자막을 뽑는다.

경우에 따라선 촬영장에도 나가고 편집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한 마디로 편집 빼고 다 한다.

그래서 작가가 아니라 잡가란 말이 있는 거다.


게다가 자막이나 원고를 쓰는 데 주어지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니 글 쓸 생각으로 방송작가하려는 사람은 재고하길 권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인지 숙고해보지 않았던 탓에 이 바닥에서 많은 날을 번민했다.


시작 당시 설정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때로는 희망차게, 때로는 의무적인 발걸음을 옮겨왔지만 나 자신을 알아가면서 그 목적지가 내가 바라는 삶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단 걸 깨달았다.


작가 일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이 바닥이 싫은 거라서, 십여 년의 걸음이 헛수고가 되는 건 싫어서

방향을 확 틀진 못하고 있지만.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이고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실수에 휘둘리지 않아야만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하는 요즘...


모쪼록 방송작가를 꿈꾸는 이가

나의 전철을 밟지 않 바라며

누가 시킨 적 없는 고해성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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