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사라지기 직전 – 남겨진 하나의 진실
- mini prolog -
기억이 무너질 때 비로소 진실이 드러난다.
형태를 잃어가는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또다시 금요일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금요일과는 다른 금요일이었다.
지난 금요일, 내가 손을 뻗어 규칙을 깨려 했던 그 순간부터 어딘가에서 작은 균열이 생긴 듯했다.
그 균열은 일주일 내내 빠르게 번져나갔고, 나는 그 묘한 어긋남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서점의 위치를 떠올릴 때마다 거리감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졌다.
한때 눈을 감아도 그대로 스며들던 공간이 이제는 한 걸음씩 멀어지는 것처럼 희미했다.
그럼에도 나는 또다시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문고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런데 그 차가움이 지금의 금속이 아니라, 오래전에 지나온 기억의 온도처럼 느껴졌다.
문을 열자 서점의 공기가 한순간 내게로 밀려왔다.
잉크 냄새, 눅눅한 나무향, 먼지의 결까지 모두 그대로였지만 그 냄새들이 스스로 균형을 잃어 공간 안에서 일정하게 흩어지지 못하고 떠다니는 듯했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안으로 들어섰다.
책장들은 분명 지난주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눈이 아니라 몸이 먼저 그 사실을 부정했다.
내가 기억하는 간격과 오늘의 간격이 어딘가 어긋나 맞지 않았다.
급히 창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늘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깨선을 스친 빛은 몸의 윤곽을 통과해 테이블 위로 흘러내렸다.
그림자도 평소보다 훨씬 옅었다.
마치 에일이라는 형체 자체가 조금씩 투명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 쪽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왔군요.”
목소리는 분명 들렸지만 어느 지점에서 울렸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공기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라 어딘가 내 머릿속 깊은 곳에서 되돌아온 메아리처럼.
나는 천천히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두 걸음 정도 남은 지점에서 바닥이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겉으로는 변하지 않았지만 안쪽에서 무언가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에일은 고개를 들었다.
내게 닿는 듯, 닿지 않는 듯 희미하게 초점을 잃은 눈으로.
“지난 금요일 이후로, 이곳이 조금 달라졌죠.”
나는 침을 삼켰다.
“당신이 먼저 규칙에 손을 대었으니까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서점의 조도가 살짝 낮아졌다.
전등의 밝기는 그대로인데 바닥 위로 떨어지는 빛의 면적이 눈에 띄게 좁아져 있었다.
에일이 손을 들어 책장 하나를 가리켰다.
그곳에서 책 한 권이 스르르 앞으로 밀려 나왔다.
표지는 흐릿했고 제목이 있던 자리는 물에 번진 잉크 자국처럼 얼룩만 남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들었다.
종이의 질감이 기존과 다르게 낯설었다.
이전까지 항상 느껴지던 묵직한 결이 사라지고 마치 오래된 필름을 손에 쥔 듯 얇고 불안정했다.
책을 펼치자 처음 몇 장은 익숙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여름의 바닷가와 밤의 버스와 겨울 전철의 흐르는 불빛.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장면의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색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빛 자체가 장면을 버티지 못한 듯 경계선이 일렁이며 번져갔다.
나는 페이지를 더 넘겼다.
그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페이지마다 달랐다.
어떤 장면에서는 입술을 떨며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장면에서는 작게 웃으며 “고마웠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또 어떤 장면에서는 말없이 나에게 다가오려는 듯한 모습이었고, 다른 장면에서는 차갑게 등을 돌리는 순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숨이 비틀렸다.
이 모든 장면이 내가 한 번쯤 상상했던 “있었으면 좋았을 대답”들이라는 사실이 한순간에 뼛 속까지 내려왔다.
손이 떨리며, 붙잡고 있던 책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건… 아니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나는 속삭였다.
하지만 페이지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내가 바라던 표정과, 내가 필요로 했던 문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낸 그녀였다.
그 사실 앞에서 가슴이 아니라 손끝이 먼저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에일의 목소리가 조용히 떨어졌다.
“당신이 바꾸고 싶었던 건 그녀의 삶이 아니라 당신이 견디지 못한 공백이었습니다.”
나는 책을 덮으려 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공백.
그녀가 끝내 말하지 않은 문장들.
내가 계속해서 상상으로 채웠던 자리는 그녀가 아닌 내 욕망의 덩어리였다.
이번엔 조금 더 깊게 바닥이 다시 흔들렸다.
서점 전체의 공기에서 밀도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장들의 그림자 길이가 몇 초 간격으로 길어졌다가 짧아졌다.
“이 공간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에일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조차 실체를 잃어가는 것처럼 들렸다.
“계속해서 바꾸려 할수록 진짜였던 부분마저 사라지죠.”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동자 속에서 초점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뭐가 진짜였죠?”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이었다.
에일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창가 쪽 빈 의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끝내 바꾸지 못한 것들.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책을 들고 서 있었다.
종이의 무게가 점점 사라져 손 안에서 공기를 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을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놓자 페이지 한 장이 바람도 없는데 가볍게 넘겨졌다.
넘겨진 페이지 위에 희미한 잉크 방울이 한 점 떨어졌다.
나는 그 한 점을 손가락으로 살짝 문질렀다.
그런데 오히려 번지지 않고 더 뚜렷해졌다.
마치 이 공간이 마지막 힘으로 하나의 흔적만을 남기려는 것처럼.
나는 빠르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
서점의 바닥 위를 스치는 내 발걸음이 오늘따라 훨씬 가벼웠다.
무엇이 빠져나가고 있는지 확실히 느껴졌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골목의 공기가 서점의 온도와 섞이며 흔들렸다.
등 뒤에서 아주 낮은 마찰음이 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서 있던 공간에서 빛 한 조각이 사라지는 소리 같았다.
골목은 조용했다.
나는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문질렀던 잉크 한 점이 아직 손가락에 남아 있었다.
지우려 손가락으로 문질렀지만 오히려 또렷해질 뿐이었다.
마치 서점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 손에 남긴 흔적처럼.
나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골목 끝의 가로등은 흔들렸고, 그 빛은 공기 속에서 찢어지듯 퍼졌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이제, 이 세계는 나보다 먼저 나를 떠나기 시작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