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 그 흔적을 찾는 공간

11. 사라진 문에서 시작된 금요일

by 이서

- mini prolog -

문이 사라진 자리에서, 먼저 길을 잃은 것은 나였다.

이별은 언제나 그렇게, 문을 닫기 전에 방향부터 지워버린다.


금요일.

사실, 이 하루가 오기까지의 일주일이 고통이었다.

지난 금요일의 붕괴가 내 안에서 계속 흔들렸고, 그 여파가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골목의 공기가 지나치게 고요한 것을 느끼는 순간 나는 그 고요가 ‘예고’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서점의 금기를 넘었던 그 밤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결국, 욕망으로 가득했던 손을 그녀에게 뻗고 말았다.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에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 빛이 찢어지고, 책들이 날아오르고, 그녀의 얼굴이 잉크처럼 번져 사라졌다.

내가 그 순간을 붙잡으려 할수록 서점은 더 크게 무너져 내렸다.

오늘 골목은 그 흔들림의 뒤안감처럼 조용했다.

서점의 간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희미한 불빛이 벽을 타고 바닥에 얇은 결을 드리웠다.

늘 그 아래엔 낡은 문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하지만 오늘, 그 부분만 이상하게 비어 있었다.

문틀도 없었고, 경첩이 남긴 어두운 자국도 사라져 있었다.

벽 전체는 멀쩡했지만, 그 자리만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했다.

그런데 내 몸이 그 자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나에게만, 문이 지워진 것 같았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손은 손잡이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발은 문턱의 높이를 기억했다.

손끝을 조심스레 앞으로 내밀었다.

공기 속에서 유리 같은 얇은 경계가 손바닥을 밀어냈다.

벽은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문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 느껴졌다.

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문과 나를 잇던 관계의 감각이 끊어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보이지 않는 문지방을 넘듯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발목에서 짧은 저항이 스쳤다가 금세 풀렸다.

그 순간 골목의 소리가 멀어졌고 서점 안쪽의 정적만이 낮은음처럼 귀에 닿았다.

서점 안은 여전히 서점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조금씩 뒤틀려 보였다.

천장의 조명은 제자리에 있었지만 불이 켜지는 데 작은 공백이 생겼다.

빛은 바닥으로 곧장 떨어지지 못하고 허공에서 한 번 꺾였다가 내려왔다.

책과 책 사이의 틈은 평소보다 좁아져 있었고 표지의 잉크는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풀려 있었다.

페이지의 흰색은 한 톤 빠져 있었고 공기마저 아주 천천히 수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익숙한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책이 한 권 펼쳐져 있었다.

지난 금요일과 같은 페이지였지만 종이의 결은 더 얇아졌고 잉크의 선명함은 오래된 복사본처럼 희미해져 있었다.

손바닥을 테이블 위에 올리자 나무의 온도와 내 손의 온도가 서로 맞지 않았다.

내 손이 더 차가운지 테이블이 더 식어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때 서점 안쪽에서 공기가 한 번 접히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책장 사이의 좁은 통로에서 미세한 기류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그 자리에 누군가 서 있음을 알았다.

에일이었다.

그의 실루엣은 선명하지 않았다.

책장의 그림자들이 겹쳐 만든 형체처럼 경계선이 여러 번 나타났다 사라졌다.

서 있는 것인지 떠 있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있던 자리의 온도가 한 칸 내려갔다.

그러나 그 냉기는 나에게 닿기 전에 스스로 흐려져 사라졌다.

조금 뒤 흔들리는 공기의 결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금요일 이후로 이곳은 당신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문은 닫히지 않았지만, 당신에게는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먼저 사라지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이곳을 찾게 하던 당신의 욕망입니다.”


단어의 끝에서 작게 떨어져 나가는 침묵이 마치 그의 존재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엇을 물어야 할지 떠올리지 못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책 위의 글자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따라 기억 속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는 문턱을 넘을 때 늘 짧게 멈췄다.

가방 끈을 고쳐 쥐고, 한 번 숨을 고른 뒤 그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오늘 떠오른 그녀는 조금 달랐다.

발걸음과 발걸음 사이의 공백이 길었고 숨을 들이마시는 속도가 반 박자 늦었다.

손끝의 떨림은 아주 미세하게 가벼워져 있었다.

그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 에일의 윤곽이 함께 흔들렸다.

동시에 마치 그녀의 숨결이 이 공간 어딘가를 흔들고 있는 것처럼.

그 공백이 나를 불렀다.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몸은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한 발을 다가섰다.

그러자 서점이 크게 흔들렸다.

책장의 모서리가 물결처럼 울렸고 조명 아래로 떨어지는 빛이 푸르게 번졌다.

바닥의 나뭇결이 순간 방향을 잃었다.

경고였다.

그 장면에 가까워질수록 이 공간이 먼저 무너질 것이라는.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한 걸음 물러나자 흔들림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장면의 선은 아주 얇게 금이 가 있었다.

에일의 윤곽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있던 자리는 책장의 그림자와 다를 바 없었다.

공기 속에 스며든 짧은 냉기만이 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남겼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 들어왔던 방향을 향했다.

보이지 않는 문턱을 다시 넘는 순간 발목에서 또 한 번 짧은 저항이 느껴졌다.

골목으로 나오자 바깥공기가 조금 더 밝게 느껴졌다.

문 하나만 사라졌을 뿐이라는 듯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저녁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내 손바닥에는 여전히 서점의 온도가 남아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균형을 잃은 공간의 온도였다.

균열은 문이 아니라 매주 금요일 내가 이곳을 찾아오게 하던 내 욕망 쪽에서 먼저 생겼다.

그것이 끊어지고 있었다.

골목 끝 가로등이 한 번 깜빡였다.

마치 무언가의 연결이 끊어지는 신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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