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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제인 Jul 30. 2024

'월터'의 '칸타빌레'는 현실이 된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당신에게 전하는 메시지

더 나은 시간을 위한 결정


  그동안 광범위하게 확장되는 업무를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거의 밤낮 구분 없이, 주중 주말 구분 없이 회사와 연관된 여러 국내외 채팅방이 시시때때로 울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재택근무가 가능했다는 것. 그러나 미팅과 현장 방문이 필요한 경우가 점점 잦아졌다. 재택근무라 일부러 서울 외곽 동네에 집을 얻었는데, 출근이 잦아질수록 지하철을 두세 번 갈아타는 피로가 함께 쌓였다. 가끔 이른 아침부터 새벽 시간까지 업무가 이어졌지만 재택근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최대한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현장 미팅 시간이 일요일 밤 9시로 잡혔다는 연락을 받았다. 앞으로도 주말에 출근하거나 미팅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 양해를 부탁한다는 요청도 이어졌다.


  순간, 오래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미 회사는 내가 일을 시작했을 시점과 업무 형태가 많이 달라져 있었고, 점점 원래 조건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근로환경으로 변하고 있었다. 조직이 속한 업태가 예술산업 분야이기 때문에 격변하는 회사의 상황도 이해가 갔다. 변화하는 이 시점에서 새 조직을 구성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현재 환경을 미리 인지한 후 업무를 새로 시작하는 게 나아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분들이 회사에 들어왔고 나도 너무 늦지 않게 회사를 정리할 수 있었다. 타인과 함께 일하는 것보다는 혼자 일을 하는 게 성격과 적성에 맞다는 건 일찌감치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무언가를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회사 시스템을 경험하고 일에서 만난 관계를 삶에서 다루어 나가는 연습을 해보고 싶었다. 타인을 위해 헌신했던 감각을 그대로, 이제는 자신을 위한 헌신을 시작해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2024년 7월, 약 7년 7개월의 모든 한국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독일에서의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직무에서 한계까지 자신을 시험해 보고 관심 분야의 깊숙한 세계를 경험했으니 모든 시간이 유익한 경험이었다. 특히 일을 하면서 다정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어 지금도 계속 기쁜 인연으로 이어나가고 있어 행복하다.


  장마가 시작됐다. 반쯤 잠든 채로 지나가는 차바퀴에 빗물이 휘감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성향과 반대되는 환경에서 번아웃과 우울, 불안을 재료 삼아 최선을 다해 자신을 단련했다. 이제는 한번 성향대로 살아보자. 걱정과는 달리, 그동안 마음을 괴롭히던 부정적인 생각은 사라져 있었다. 당장의 고정 수입이 사라져 앞으로의 생존 문제가 달려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회사 생활 중에 느꼈던 압박과 불안감 정도의 걱정은 마음을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글을 쓰고 사진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해야 할 일이 바로 눈에 보인다는 것, 건강한 지표다. 독일어로 표현하자면 Alles in Ordnung. 모든 게 잘 정리되어 있는 기분이다.



참을 수 없는 것들의 힘


  치아키 선배와 떨어지는 게 싫어서 피아노 연습에 맹렬히 몰입한 노다메(2006년 방영한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의 여주인공)도, 폐간호를 장식할 25번 사진이 사라져 직업을 잃을 위기에 처해 직접 사진작가를 찾아 나선 월터(2013년 개봉한 벤 스틸러 감독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남주인공)도 모두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기 한계를 시험하는 수고로움을 자처한다. 노다메는 자유롭게 연주하려는 본래 성질을 이겨내고 기피하던 혹독한 레슨과 훈련을 감내한다. 월터는 사진작가 션을 찾아 나서는 중에 자연스레 '소심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들을 마주하고 이를 대처해 나간다.


  2주간의 출근과 숨 넘어갈 듯한 인수인계를 끝내고 금요일 저녁 마지막 퇴근길에 올랐다. 어깨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유난히 지하철에 사람들이 많았다. 내 신체부위 하나하나가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과 밀착한 상태로 이동하는 게 너무 끔찍해 애초에 서울에서 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나였다. 불쾌한 기분이 99까지 차오르다가 이 지옥철을 매일 견디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시리즈물을 보거나 게임을 하며 이미 자기만의 세상으로 탈출한 사람들, 눈을 지그시 감고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초월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를 매일 견뎌내는 사람들의 작은 위대함을 생각하자 신체접촉으로 인한 불쾌감은 잊히고 마음을 구성하는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못 견딘 부분들⎯24시간 업무 긴장 상태와 출퇴근길의 수고로움⎯까지 모조리 담아 온 힘을 다해 나의 일에 매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끔은 달콤한 보상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할 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새로운 시작에 영감을 주는 작품


  평소에 혼자 지내는 적적함을 달래고 스트레스 해소도 할 겸 식사나 청소, 샤워를 할 때 영상을 틀어두는 편이다. 퇴사를 준비하는 동안 10년 전에 봤던 드라마와 영화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어떤 작품에 묘하게 끌리면 그 안에 세상이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꼭 하나씩 숨어 있기 마련이다. 총 11화로 이루어진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는 유월 한 달 동안 시간이 될 때 틈틈이 보았고,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퇴사한 주말에 장맛비와 함께 투명한 기분으로 감상했다.


출처: 노다메 칸타빌레(드라마) 나무위키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는 클래식 음악을 테마로 한 만큼 유럽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독일어가 중간중간 나와서 무척 반가웠다. 고등학생 때 이 드라마를 처음 봤을 대는 이게 독일어인지, 어디 다른 나라의 언어인지도 몰랐는데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는 지금 새롭게 들리고 보이는 장면들이 있어서 신기했다. 유럽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주인공들의 대화에서 나도 달뜬 결의를 다졌다. 강의 시작 후 9개월 안에 독일어 B1 어학시험에 통과하면 교재비를 제외한 강의료를 환급해 주는 프로그램을 신청한 것이다. 독일어를 잘하고 싶다는 희망뿐만 아니라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부정적인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욕구까지 제대로 건드려주는 동기부여였다. 여름 동안 A1를 끝내고 A2를 최대한 많이 익히는 게 목표다. 책 읽는 시간까지 모조리 투자해서 독일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즘, 새로운 나라에서 더 많은 우연을 마주치기 위해 배우는 낯선 언어가 힘들어도 즐겁다.



출처: 디즈니+


  대학생 때 처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았다. 그때 나의 초점은 '여행'과 '모험'이었다. 야생 어딘가에 있을 사진작가를 찾는 여정이니, 속이 뚫리는 시원한 영상이 이미 보장되어 있는 영화다. 어렸을 때는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장면만 봐도 가슴이 설렜다. 미지의 세계를 사진으로 담고 싶은 마음이 폭발하던 시절이었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진작가 션 오코넬처럼 몇 년 뒤 나도 뉴질랜드로 날아갔다. 그리고 지금, 회사를 그만두는 시점에 다시 본 이 영화는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찾아 자신감을 회복한 월터와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공개되는 '25번 사진'의 이미지가 더욱 인상에 남았다. 자기가 하는 일에 확신이 있으면 빛이 난다. 역시나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에너지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걸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퇴사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우리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저 그걸 차근차근해나가면 된다. 다만, 그에 수반하는 무수한 귀찮음을 함께 끌어안으면 된다. 이를 위해 원하는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좋지만, 피하고 싶은 최악의 상황을 인지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하지 않을 핑계를 찾고 있다면 정말로 하지 않게 된다. 하려고 하는 에너지를 선택했다면 이미 작은 걸음이라도 내디뎠을 것이다.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인생은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미세한 손길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음악 용어인 '칸타빌레'의 뜻은 '노래하듯이'라고 한다. 연주자가 자신의 악기로 마치 노래하듯이 멜로디를 연주하라는 지시다. 우리도 원하는 일을 향한 자질구레한 모든 과정들을 '노래하듯이' 연주해 보면 어떨까. 끝으로 영화 속에 등장한 LIFE 매거진의 모토를 옮기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is the Purpose of LIFE."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LIFE)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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