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미자, 하나씩 내려놓으며 산다 산문집 중, 2013
늘 내안에 나는 등짐이 힘겨웠다. 그래선지 꿈에선 종종 날아다니기도 했다. 깨어나면 또 다시 끙끙거렸다. 거러던 날, 수필 강의를 들었다. '수필은 곧 나'라는 주제였다. 내 안에 끙끙거리는 나를 대명천지에 내어 놓으면 그 무거운 짐이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어느 해 체중이 5kg이 늘면서 당뇨합병증이 심해지는 것도 몰랐었다. 가로등이 뿌옇게 보이고, 치아가 모두 흔들리고, 다리에 쥐나면 피멍을 남기고 풀어지는 횟수가 잦았다. 내분비내과 검사결과 콜레스테롤은 중풍 직전이라며 육류는 살코기도 지방도 끼어 있다며 정 먹고 싶으면 한두 점만 먹으라고 했다. 안과에선 수술하는 방법밖에 없으나 수술이 잘 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마찬가지였다. '기차는 이미 출발했습니다. 당 수치는 정상으로 떨어져도 합병증은 진행됩니다.' 라고 하는 의사. 방망이로 머리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별이 보이고 천 길 낭떠러지 난간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상황에 수술한들 얼마나 좋아지겠는가. 소중한 모든 것을 두고 삶을 포기할 순 없었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운동 식이요법등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끼니마다 평소에 먹고 싶었던 것을 후식으로 조금 먹은 후 무공해 생야채와 호박나물 가지나물 등으로 위장을 어느 정도 채우고 공기 밥 사분의 일만 먹었다. 발등에 불 떨어졌기 때문일까. 고기 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대신 하루에 보약 한 봉을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 오이든 사과든 먹은 후 물 한 컴에 감식초 조금 타서 마셨다. 돌미나리생즙은 무성할 때 베어다 살짝 데쳐 한주먹씩 냉동실에 넣어 두고 가을에도 즙을 내어 한 컵씩 마셨다. '허구한 날 그렇게 먹고 어떻게 살아.'라고 할 수 있겠지만 2~3주만 견디면 익숙해지며 성과가 보인다. 점점 눈도 밝아졌고, 이아도 제자리를 잡아갔다. 시도한 지 9개월 만에 의사는 벌떡 일어서며 '모두 정상인데요, 아주 건강합니다. 어떻게 관리 했습니까?"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당 수치만 정상인 줄 알았는데 불치라는 합병증까지 정상이 될 줄이야. 놀라는 의사 앞에서 터진 것 같은 눈물샘을 막을 수가 없었다.
수화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가족들의 음성도 목 메여선지 간간히 끊겼다. 그 동안 끼니마다 내 위주로 식사해야만 했고, 외식 한번 맘 편히 못하고 우왕좌왕 찾아다니며 먹어야 했던 나날들, 투병한 지 20여년 만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건강한 나로...
미루었던 수필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내 안의 나를 풀다가 끊기어서 뒤바뀌어도, 못나온 조각들의 빈자리가 휑하여도 눈을 감고 대명천지에 내어 놓았다. 벗은 채로 산만한 모습이 낮 뜨거웠지만 스승님은 대견하게 여겼다. 오늘은 어정어정 걷지만 나중엔 뛸 수도 있고, 푸른 하늘을 날 수도 있다고 힘을 주었다.
하루는 스승님께서 동서문학에 응모해 보라고 했다. 마감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어차피 자신감을 주려는 의도지 싶어 응모했다. 어느 날 날라온 상패는 온 가족을 흥분시키는 불꽃이 되었다. 냉가슴에 군불 집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무거운 발짝으로 추억으로 미래로 상상 속으로 가는 길에서 헤매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 않을까?
하나씩 내려 놓다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