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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채미자, 하나씩 내려 놓으며 산다. 산문집 2013년

by 채미자

텃밭에서 상추를 뜯어왔다. 물로 씻으려고 하는데 상추입 같이 푸른 새끼사마귀 한 마리가 상추 잎을 밟고 서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점심 먹으려고 식탁 앞에 앉은 남편이 상추 씻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새끼사마귀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새끼사마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대문 밖으로 나가 으름넝쿨 울타리로 가서 으름 잎사귀에 손바닥을 대었다. 새끼사마귀가 이파리 위로 냉큼 올라탓다. 손바닥에 있는 동안 꼼짝도 않더니, 놓아 줄 것을 알아챘던 걸까.

"새끼사마귀야! 건강하게 잘 자라라!"

꽤 넓은 산자락텃밭은 화확약품을 주지 않아 흙은 살아서 꿈틀거리고 새와 곤충들이 햇빛을 나눠먹으며 잘들 살아간다.

그 텃밭에는 밥이 궁했던 어린 시절 즐겨먹던 으름 다래, 머루, 아그배, 돌배 등이 잘 자라고 있다. 이 곳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고향 칠갑산에서 구해다 심었다. 여러해살이 산나물, 들나물, 채마도 심었다. 가난했기에 부모형제간의 정이 더욱 끈끈했던 그때 서로 양보하며 나누어 먹던 열매와 나물들을 텃밭에 심어놓았다. 처음에는 벌레들이 다 먹고 남은 것을 이삭 줍듯이 뜯어먹었었다.

한 7,8년 쯤 지나니까 흙도 식물들도 건강해져서 벌레들을 이겨냈다. 요즘은 나물을 인심써가며 먹어도 못다 먹는다. 아낄 필요도 없다. 아끼다가 나물이 쇠니까 부지런히 뜯고 새순 나오면 또 뜯는다. 약주는 밭에는 씨앗을 따로 뿌려야 뜯어먹을 수 있는 자연산 민들레, 씀바귀 비듬 등이 저절로 돋아난다. 숨 쉬는 흙이 주는 덤이다.

그런데 텃밭에 나물 뜯으러 갈려면 옷소매와 바지 길이가 긴 두꺼운 옷을 입고 들어가야 한다. 모기의 주둥이가 얇은 여름옷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벌레들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나물먹고 싶어도 참을 때가 많다. 모기한테 헌혈하기 싫으니까.

풀꽃이 또 피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밭에 풀을 다섯 번 뽑아준다. 봄꽃, 여름풀은 덥고 벌레들이 많아서 뽑을 수가 없다. 가을꽃, 그 사이 피는 꽃, 두 번 더해서 꽃이 씨앗 맺을 무렵 풀을 3차례 뽑는다. 그렇게 풀씨를 잡아도 새들의 밭에 씨앗이 묻어오고, 배설물에서 나오고, 바람에 날아와 돋아나기 때문에 풀이 많다. 이곳으로 이주한 그 때, 텃밭 한쪽 귀퉁이에다 심은 나팔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이듬해부터 나팔꽃 싹이 나오면 풀처럼 뽑고 뽑아서 씨앗 맺을 겨를이 없었다. 한번 땅에 떨어진 씨앗이 15년이 넘도록 싹이 나온다.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긴 하지만 지금도 몇 포기씩 나온다. 그러니까 밭에 풀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농사짓기는 정말 힘들다. 약을 안치고 농사짓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나 곤충도 식물도 건강하게 사는 것이 좋으니까. 고생스러워도 손수 풀을 뽑고 퇴비를 주고 있다.

텃밧에서 풀 뽑는데 풀잎 끝에서 새끼사마귀 한 마리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으름이파리에 놓아준 꼭 그만한 새끼사마귀다. 집과 텃밭 사이 족히 200m쯤 되는데, 으름 잎에 놓아준 새끼사마귀는 아닐 것이고, 시기적으로 사마귀 새끼들이 태어날 때인가. 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새, 곤충들이 대부분 화들짝 놀라 줄행랑을 치는데 새끼사마귀는 내 앞으로도 여유롭다.

그 후로도 고구마잎, 곤드레나물잎, 고추잎에서 새끼사마귀를 종종 보았다. 전에는 눈에 잘 띄지 않았는데 나와 연분이 된 후로 자주 띈다. 왜 자꾸 새끼사마귀만 눈에 띄는 걸까? 우연 같은 필연인가.

광활한 우주공간에 개미만한 내가 사마귀들의 세계를 어찌 알겠는가. 그 것들도 거리와 상관없이 서로 소통이 잘 되는지도 모른다. 내가 새끼사마귀를 구해준 소문이 그들 세계에 퍼져서 형제새끼사마귀들이 내 앞에 나타나 재롱부리는 건지도 모른다.

"새끼사마귀야!, 다음에 만날 때는 너희 엄마하고 같이 오렴. 우리, 잘 사귀어보자."

잔디밭 가장자리에 심은 가지를 따러 갔다. 가지를 바구니에 담고 잔디밭에 앉았다. 보라색인 가지가 몸에 좋다는 말을 들어서 어린가지를 한 입 베어 먹고 있었다. 또 새끼사마귀가 잔디사이에 있었다.

"또 만났구나!"하며 손가락으로 옆에 있는 잔디 풀잎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때, 어미사마귀가 툭 불거진 눈을 굴리며 보고 있지 않은가. 신기했다. 그냥 해본 소리인데 새끼사마귀가 어미사마귀와 같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반가웠다.

"새끼사마귀야! 약속을 지켰구나!"

정말 새끼사마귀가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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