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소나무

채미자, 하나씩 내려놓으며 산다 산문집중 2013년

by 채미자

"와~"

입을 벌린 채로 발길을 멈췄다. 월야경이 기막혔다. 9월 어느 날,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와 어둠이 깔려 있는 울타리 철망문안으로 들어섰을 때다. 하늘 높이 뜬 달보다 배는 크고, 배는 더 밝은 달이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소나무 가지에 얹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주변의 어둠이 모두 까무러쳤다. 달과 소나무, 소나무와 달을 선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진경이 변할까 봐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 무아지경을 카메라에 담는다고 얼마나 담아지겠느냐 만은 카메라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한 번은 그랬을 텐데 왜 진작 못 보았을까.

바람이 불면 그 리듬에 맞춰 춤추는 것 같은 두 그루의 토종 소나무, 남향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집 현관 맞은편 마당가에 있다. 나의 품안으로 들어올 정도의 둘레다. 조금 높은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검붉으면서 가지가 굵은 것이 수소나무 같고, 분홍색에다 족ㅁ 작아서 가녀리게 보이는 것이 암소나무 같다. 가장의 위엄이 느껴지는 수소나무에 기댄 듯이 조금 낮은 자리 한 발짝 뒤로 다소곳이 서 있는 암소나무는 가녀린 편이다. 그래서 부부소나무 같다. 처음 보는 사람도 대개 그리들 본다.

사람의 겉모습만으로도 내면이 어느 정도 보이듯이 권위적인 남편과 내가 사는 모습과 비슷하다. 인적 없는 외딴 집에서 어차피 자연과 벗 삼아야 할 처지다보니 무료하면 소문 날 걱정은 없는 암솔과 넉두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속상할 땐 속내를 털어 놓고 남편 험담도 한다. 어떤 때는 부둥켜안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정들면서 나무와 익숙해진 탓일까? 관광할 때 고찰이나 산길에서 오래 묵은 소나무를 만나면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이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며 향기에 젖기도 한다.

추석 일주일전, 울타리 콩을 따고 있는데 울 밖에서 엘크(소만한 사슴) 수사슴이 목을 길게 빼고 울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남의 사슴사육장에서 뛰쳐나온 엘크가 우리 사슴사육장을 기웃거렷던 것이다. 그 후로도 종종 넘겨다보아 신경 쓰였지만 추석차례음식하기 바빠 잊고 있었다. 추석날 아침, 차례 지낸 음식을 양푼에 담아 고수레하러 나간 남편이 콩 튀듯이 들어와 "자네 집에서 뭣 하는 거야? 엘크가 받아 소나무가 죽게 생겼잖아!" 무섭게 몰아 붙이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했지만, "안 돼! 죽지 마!" 단숨에 소나무 밑으로 갔다. 하필이면 암소나무가 50cm 정도 하얗게 벗겨져서 송진이 줄줄 흐르고 있지 않은가. 뿔자리 가려운 엘크가 서정없이 비벼댄 모양이다. 나는 콧물 눈물 흘리며 흙을 마구 파 상처에 덕지덕지 바르며 "못 지켜주어서 미안해!"를 연발했다. 제발 죽지 말고, 살아달라고 애원했다. 암소나무 없는 나의 집은 상상하기 싫었다.

그 무렵, 내 몸은 당뇨합병증으로 모든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그 당시 당 수치가 500이 넘었다. 의사는 "이미 기차는 출발했습니다. 당 수치는 떨어져도 합병증은 진행됩니다."라고 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하루는 암소나무를 껴안고 볼을 가만히 대었다.

"나도 힘든데, 너도 많이 힘들지. 그래도 잘 견뎌줘! 사랑한다!"라고 했더니 그 순간 시선 멎는 가지 끝에 솔잎이 파르르 떠는 것이 아닌가. 분명 바람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 것이다. 이심전심은 나무라고 예외겠는가. 지난 여름, 오디 따 먹으려고 뽕나무에 사다리 놓고 올라서서 오디 따 먹고 있는데 사다리가 밀리면서 껍질이 조금 벗겨졌을 때도 뽕나무가 떨어서 기대고 있는 나도 떨었다. 매우 아팠던 모양이었다. 밤에는 잎을 접고 자는 자작나무와 나팔꽃을 보면 나무들도 움직이는데 미처 몰랐던 것일까.

첫서리가 내린 날, 남편은 우리집 소나무도 죽을지 모른다며 짚으로 두툼하게 싸주었다. 엘크가 껍질 벗겨놓은 이웃 소나무가 누르스름하게 죽어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암소나무가 수소나무보다 노란 낙엽이 많았다. 내 몸 챙기기 바빠 신경 못써 미안했다. 입지 않는 털 코트를 찾아다 입혀주었더니 잘 맞았다.

"이 겨울 잘 견뎌 꼭 살아다오."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 왔다. 진달래꽃 개나리꽃이 피고 산과 들거리마다 만개한 꽃에 벌 나비가 날아들고 사람들이 꽃 잔치하는데, 나의 시선은 아직도 겨울인 암솔 가지 끝에서 새순을 기다리며 애태웠다.

"제발 눈뜨고 날 좀 봐!" 주변에 솔꽃이 피었다가 지고, 솔방울을 맺을 무렵, 기다리던 새순이 뽀죡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살았구나! 기어이 이겨 냈구나!" 암솔을 부둥켜안았다. 또한 얼마 전 회복할 수 없다던 나의 합병증과 당뇨수치가 모두 정상이라며 의사가 놀라워했다. 다시 태어난 흥분에 들떠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나의 음성이 어찌나 컸던지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다. 그 흥분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데 암솔이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소나무야! 암소나무야! 다시 살아나서 고맙다. 우리부부 사는 날까지 너희 부부와 동거동락하자. 달을 불러 가지에 걸고, 환하게 불밝히며 더불어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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