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뭐랄까 문학을 읽는다면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책.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볼 때 주인공이 읽고 있던 게 왠지 기억에 남았던 책이다. 내게 이방인이라 하면 김동률의 이방인 뿐이었는데. 이곳저곳에서 계속 눈에 밟혀 샀다. 산 지 4년이 지났다. 그래도 그동안 가장 가까운 서재에 두고 있었다. 이제 문학을 읽어야겠단 충동이 일자 그럼 제일 먼저 이 책을 읽어야겠다 하고 읽었다.
대개 실용 서적 위주로 책을 읽다 보니 정보 획득이 책 읽기에 주목적이 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간간이 펴본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그래서 뭐?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라는 회의가 게속 들었다. 이거 읽고 뭘 얻을 수 있을까, 어디 써먹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만큼 실용성에 젖어 있었다.
이 책을 다 읽은 소감을 돌아볼 때 특별히 얻은 지식 같은 건 없다. 내내 그런 느낌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실용성에 대한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나는 곧장 카뮈가 만든 이 세상에 빠져들어갔다. 수월히 읽히는가 싶더니 갈 길이 멀었고, 이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려나 할 때 끝났다.
이방인, 한 사내의 이야기
책에 서문에 "<이방인>을 아무런 영웅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사내의 이야기라고 읽는다면 과히 틀리지 않은 셈이다." 란 말이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감이 안 오는 문구다. 책을 읽고 나니 이것만큼 간결하고 확실한 초강스포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뫼르소란 인물은 독특하다. 염세적인 듯하면서도 욕망에 충실하다. 주위에 무관심하면서도 신경 쓴다. 츤데레가 아닌데도 츤데레 같은 모습이 있다. 회색 빛이 감도는 츤데레랄까. 그가 주로 하는 말은 "아무 이유 없으니깐", "아무 의미 없긴 하지만" 이런 말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떤 사회적 개념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런 건 의미 없다 생각한다.
아무 상관없으니까,라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도리어 사람들이 피하는 사람들을 피하지 않는다. 피할 이유가 없으니깐.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피하지 않기에 그와 가까워지고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는 원래 그렇진 않았다. "학생이었을 때야 나도 그런 종류의 야심을 상당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자, 나는 그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주 빨리 깨달았던 것이다." 태세 변환이 우디ㄹ.. 아니 굉장히 빨랐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사회적인 관념에 의미 없단 생각이 확고히 삶에 박히게 된다. 결혼하자는 마리의 말에 답변으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등이 계속 나온다. 이런 태도는 책 전반에 잘 묘사된다.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자, 사회가 그를 거부한다
책은 유명한 "오늘, 엄마가 죽었다." 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엄마의 장례식에 그는 솔직하게 행동한다. 엄마와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깊은 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슬플 일도 없었고 슬퍼하지 않았다. 그냥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밤을 새웠고 관을 묻었다. 다만 사회가 그 이상으로 요구하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 슬픔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들로서 할 일은 장례식을 치르는 거지 우는 게 아니라 생각했다. 슬퍼할 마음이 없는데 슬퍼하는 척하며 눈물 흘리는 것은 그에게 거짓말을 시키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하지 않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연한 사회적 행동을 거부한 그는 이제 사회에서 거부당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는 이들과 안 어울릴 이유가 없어 어울리고, 안 도와줄 이유가 없어 돕다가 일이 꼬인다. "네 발의 총성이 내게는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와도 같았다" 란 말로 1부가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2부로 들어간다.
2부에서 사람들은 뫼르소에게 인간이면 당연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요구한다. 그런 것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뫼르소는 모두 없다고 고백하고 갖기를 거부한다. 후회, 종교, 슬픔 등을. 그가 거부한 모든 것들은 그를 거부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이제 그를 두고 법적 공방이 진행된다. 그에게 호의를 받았던 사람들이 그를 변호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고, 무시받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말 또한 무시된다. 그저 검사와 변호사, 배심원과 판사만의 장이었다. "그들은 나를 제쳐 놓고 내 사건을 다르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은 나의 개입이 배제된 채 진행되었다. 내 운명이 내 의견의 반영 없이 처분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이 법정으로부터 아주 멀어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전말을 아는 이들이 볼 때 이 판결이 불합리한 진행임을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그것이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음도 본다.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도 흘리지 않고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고, 그다음 날에 여자와 뒹굴며 영화 보는 이가 누군가 살인했을 때 우발적인 게 아니라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임을 역설한 검사의 말에 뫼르소 또한 그럴듯함을 느꼈다. 그것과 살인의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 해도 중요한 건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 느껴진다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하면서도 그것만큼 설득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확신이 없다는 것.
결국 불합리한 일이 합리적 판결이란 이름으로 진행되어 한 사람의 삶을 끝낸다. 그리고 불합리함을 이야기해봐야 의미 없음을 알던 남자는 불합리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죽음 또한 안는다. 그는 그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항소에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자연스럽지 않음을 안다.
불합리한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행복한 사람
"삶이 그다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서른에 죽으나 일흔에 죽으나 별 중요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 순간을 놓고 보면, 언제 어떻게 죽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 죽든 20년 후에 죽든, 어쨌든 죽는 것은 항상 나였다. 다만 추론을 하면서 그 대목에 이르렀을 때 약간 곤란했던 것은, 앞으로 살 수 있을 20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어마어마한 흥분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라는 고백을 통해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깔끔하게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골랐고 그것에 후회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죽음을 스스로 택했지만 행복한 사람이었다. "... 세상의 애정 어린 무심함을 향해 내 자신을 열었다. 세상이 그처럼 나와 닮았다는 것을, 요컨대 그토록 형제같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나는 내가 행복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살 수 있는 출구는 없었다. 그때 그는 어떻게든 살려고 노력하는, 지금까지와 다른 자신이 되기보다 자신답게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안 그럴 이유가 있나? 지금 죽나 나중에 죽나 죽는 건 똑같은 걸'이라 하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거기서 자유를 느끼고 확신을 얻으며 행복해한다.
처음에 말한 서문에 있던 내용 그 자체가 책의 내용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다. 명쾌한 문장 덕에 막힘 없이 읽었지만 책을 덮을 땐 맑으면서도 찝찝함 느낌이 온다. 죽을 수밖에 없게 몰아지는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 결코 저항하지 않을 성격인 주인공을 보며 결말을 예측할 수 있다. 결말이 우리 입장에선 비극이라 할 수 있는데 정작 뫼르소에겐 확실히 비극이 아님에서 오는 괴리감이 그렇다.
내가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이유도 없음에도 모종의 이유를 만든 것은 아닌지. 내 인생에 선택에 있어서 나는 확신을 하고 있는지, 후회 없이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뫼르소처럼 이유가 없으면 정말 없기 때문에 행동하고,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 삶, 설령 그 선택이 비극으로 향하게 해 무섭게 해도 후회하지 않고 나아가는 삶을 보니 묘한 매력을 느낀다.
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냥 죽어버린 것 같으면서도 자기 소신을 죽음 앞에서도 지킨 사람의 삶에서 오는 무언가.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 앞에서도 개의치 않고 자기답게 삶을 선택하는 모습에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작은 숙연함에서 오는.
왜 책 제목이 <이방인>일까? 우리와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져서일까? 죽음에 대해서도, 우리가 당연하다 느끼는 관념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사람. 우리와 같은 가치관이 아닌 사람이어서일까? 우리 안에 결코 깊게 녹아들을 수 없는, 좋아하긴 하지만 결혼할 수 없는 이여서일까?
사회 구성원이면 당연히 당연히 할 일들을 거부하였기에 거부당하였던 그이다. 우리와 같은 사회 구성원이 아닌 '무언가 다른 사람' 이어서 이방인이라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래는 좋았던 문장들.
"나는 예전에는 하루하루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긴 동시에 짧을 수 있는지 몰랐다. 살아 내기에는 긷라 할 수 있을 나날의 시간들은 늘어나고 또 늘어난 끝에 마침내 서로 범람하기에 이르렀고, 그럼으로써 제 이름을 잃고 말았다. 이제 내게는 어제나 오늘이란 단어만이 유일하게 의미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우정 어린 태도로, 아니 거의 애정을 담아서, 그동안 내게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진정으로 후회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고 설명해 주고 싶었다.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닥칠지, 항상 그 문제에 정신을 쏟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 "
"가장 사소하면서도 그 무엇보다 오래가는 기쁨을 안겨 주었던,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내게 속하지 않는 삶의 갖가지 추억들이 나를 엄습했다. 여름의 냄새들, 내가 좋아하던 거리, 저녁의 어떤 하늘빛, 마리의 웃음과 그녀의 원피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