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 웹툰 <송곳> 중
이 책에 대한 정보는 거의 기억에 없다. 조지 오웰이 썼다는 것과 동물이 등장한다는 것과 마지막 장면이 묘사된 그림뿐. 그마저도 흐릿하다. 찾아보려 했으나 닮은 걸 찾기 어려웠다. 돼지가 인간처럼 있는 모습이 꽤 현실적으로 그래서 더 기괴하게 느껴졌던 그림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니라 이 책에 담긴 역사적 의의나 의미를 다 알진 못했다. 서문에 의하면 각각 동물들이 의도한 바가 있다고 한다. 그걸 알고 봐도 그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읽으면서 누가 떠오른다기 보단 인간상이 떠올랐다. 우리들의 모습이랄까.
소설은 동물들의 현 상태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한다. 역사에 큰 기점은 대개 내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 또는 불평할 상황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한 원로 돼지의 연설로 동물들은 삶을 다시 보게 되는 일종의 각성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 똑똑한 돼지들이 이후의 상황을 주도하게 된다. 혁명 후엔 '자신의 뜻은 반드시 관철한다'는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몸뚱이가 겨우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만 먹이를 받아먹고 있소.... 영국 땅은 기름지고 기후도 좋아서, 지금보다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동물들이라도 충분하게 먹고살 만큼 곡식이 많이 나올 수 있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비참한 상태에 계속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힘들게 생산한 것을 거의 모두 인간이 빼앗아 가기 때문이오. 동무들, 우리가 처한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그것이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이오." 33쪽 이 말에 동물들은 각성해 농장에서 인간을 쫓아내고 '장원 농장'에서 '동물 농장'으로 바꾼다.
혁명의 초기엔 급진적으로 진행된다. 인간을 몰아내고 인간의 잔재를 청산하려 한다. 몇 가지 좋아 보이는 건 둔 채로. 혁명이 성공한 뒤 조금 이상한 낌새가 있었지만 생산성이 대폭 좋아지면서 바로 잊힌다. 돼지들은 일을 시키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으니 당연한 것처럼. 생산된 것들은 낭비되는 게 없어 보였고 아무도 훔쳐 먹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일곱 계명을 지었다.
동물농장의 일곱 계명
1. 두 발로 걷는 자는 누구든 적이다.
2. 네발로 걷거나 날개가 달린 자는 누구든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으면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돼지들의 주도로 지어진 이 계명은 모든 동물들이 영원히 준수하며 살아야 한다고 설명됐다. 돼지와 다른 동물들 지식의 차이가 워낙 컸기에 돼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여기서 관심과 이해도에 차이가 중요하게 드러났다. 관심이 있어도 무슨 일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설득당한다. 이해해도 관심이 없으면 그냥 그러가보지 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둘 다 없으면 끌려간다. 정치권에 관심이 없다면 모두 정치인들이 뭘 하는 지도 모르고 끌려 가듯이.
안건을 제출하는 것은 언제나 돼지의 몫이다. 다른 동물들은 투표의 방식은 이해했으나 안건을 생각해내진 못했다. 결국 돼지 뜻대로만 농장이 움직인다. 돼지들은 이미 완벽하게 읽고 쓸 수 있었다. 돼지들만 내려고 한 게 아니라 동물들은 의견이란 게 없었다. 그때그때 말하는 돼지의 의견에 항상 동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권 의식엔 갖가지 명분을 다 붙여 합리화하는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돼지들은 굉장한 통치 기술들을 보여준다. "존스(인간)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자는 설마 없겠지요?" 라 하며 공포를 정말 잘 활용한다. 마치 전쟁, 경제 후퇴, 노예를 써먹는 모습과 같다. 부도덕함이 드러나면 갑자기 전쟁 공포가 생기게 어디서 포격이 시작된다던지. 이 패턴이 굉장히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곧잘 넘어간다. 공포에 눌리면 수많은 불합리에도 불합리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잊어 버린다.
악의적인 소문으로 허수아비 적의 활용도 잘한다. 지금 우리가 힘든 이유는 다름 아닌 밖에 있는 무언가 때문인 것이다. 이건 진짜 효과적이어서 많이 사용된다. 또한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마다 소리를 질러 방해하는 양떼는 일종의 가십을 내놓는 언론과 같다. 중요한 국정 문제가 터질 때마다 생기는 연예 스캔들이 생각난다. 잠시만 일간 검색어 순위를 막으면 되는 거다. 잠시만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덮으면 되는 거다. 그러면 되는 거다.
돼지 중 발군의 정치력을 갖춘 나폴레옹은 강아지를 따로 떼어 자기만의 수족으로 부리기 위해 교육을 시킨다. 어릴 때부터 세뇌 교육을 시킨 것이다 북한과 비슷하게. 결국 자란 개들의 무력으로 세력을 잡는다. 세뇌시킨 군대와 같다. 토론 금지시킨다. 북한에서 보이는 지도자 우상화 등이 잘 묘사된다. 나폴레옹은 위에 말한 양떼를 먼저 얻으면서 언론을 얻었고 군대를 얻으니 그 입지는 공고해졌다.
동물들은 전보다 더 혹독히 노예처럼 일하지만 '공포의 허상'을 생각하면 지금이 낫다며 만족해한다. 약속된 말이 조금씩 바뀌어도 이걸 눈치챌 쯤이면 왜곡의 달인 스컬리가 나타난다. 그가 말만 하면 모두 설득된다. 괴벨스가 생각났다. 나폴레옹은 여론까지 얻어낼 수 있다.
사실상 다 얻은 것이다. 왜곡과 선동, 조작과 현혹이 만들어낸 결과는 수정된 일곱 계명으로 볼 수 있다.
동물(장원) 농장의 일곱 계명
1. 두 발로 걷는 자는 누구든 적이다.
2. 네발로 걷거나 날개가 달린 자는 누구든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으면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보)에서 자면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너무 많이) 술을 마시면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이유 없이) 죽이면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
마지막엔 결국 7번째 계명만 남는다. 이 계명으로 돼지와 개의 특권은 정당화되고 나머지 6 계명은 지워진다. 그러고 나서 돼지는 인간이 되어 가고, 과거의 '장원 농장'에서 '동물 농장' 되었다가 다시 '장원 농장'으로 회귀한다. 굉장히 우울한 마무리로 책은 끝난다. 전체를 봤을 때 이 농장에서 동물들이 다시 자유를 얻기엔 쉽지 않아 보인다. 책을 읽는 내내, 덮고 나서도 한동안 찜찜함을 주는 건 작가가 묘사한 동물 농장의 세계가 내가 사는 곳의 치부를 극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심해 보이는 동물들, 무지한 동물들의 모습이 결국 나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 책의 핵심엔 돼지들의 각성에 있다. 돼지들은 능력이 있다. 돼지들은 현재를 인식한 후 바꾼다. 그리고 상황을 바꾸면서 동시에 상황을 지배할 능력이 있음도 알게 된다. 그들에게 혁명은 자신의 억압에서의 해방이었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특권의 획득을 향한 길로 이어진다. 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위에 있을 수 있게 되자 위에 있게 됐고, 위에 있게 되자 위에 있던 인간과 똑같아졌다.
여기서 묘사되는 인간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진 않다. 그냥 기득권의 다른 모습일 뿐이니. 주목한 점은 상황이 달라짐에도 달라지지 못하는 그냥 동물들이다. 어떤 혁명이 일어나도 대다수의 동물이 각성하지 못하면 또 다른 동물이 돼지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순진하거나 착하면서 똑똑한 동물은 제거될 것이다. 이 패턴은 반복될 것이다.
뭐랄까. 답이 없다. 교육의 중요성도, 행동의 중요성도, 관심의 촉구도 필요하다. 하지만 전혀 바뀌지 않는 아니 바뀔 수 없을 것 같을 때 회의가 든다. 답 없이 이 책을 덮긴 싫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라는 글자가 입에 머문다. 우리 상황은 분명 그렇지만 그래도. 그래도라는 단어를 놓진 말자. 그래도 해보자. 그래도 살아보자. 그래도 바꿔보자. 그 외에 다른 답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