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으로 택시를 불렀다. 생각보다 빨리 와서 후다닥 나갔다. 택시 문을 닫을 때 갑자기 번뜩 '에어컨 안 끈 것 같다'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택시 기사님께 에어컨 좀 끄고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기사님은 대부분 그런 생각 들면 끄고 온 거다, 라며 안심시키고 출발하시려고 했다. 나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고 집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다시 택시를 타니 기사님이 '켜 있었어요?'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네, 끄러 가길 잘했어요'라고 말했다. 다시 보지 않을 분이고, 켜있든 말든 상관없는 데 거짓말을 왜 굳이 했을까?
거짓말에 관한 연구 결과는 조사 기관마다 편차가 있지만, 어디에도 거짓말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이야기를 본 적 있다. 우리 모두는 거짓말을 한다. 하루 종일 아무도 안 만난다면 모를까,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거짓말은 하게 되어 있다. 누군가 나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사람이 거짓말쟁이라고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사소한 거짓말은 그냥 그 시점에 휘발되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런데 어떤 거짓말은 계속 신경 써야 하고, 자칫하면 점점 커져서 감당이 안 될 수도 있다. '밥 먹었어?'라는 질문에 안 먹었지만 안 먹었다고 하면 번거로울 것 같아 '응'이라고 답하고 거기서 마무리되면 문제 될 게 없다. 그런데 '누구랑 먹었어?' '친구랑', '친구 누구?' '고등학교 때 친구'...처럼 불어나면, 갑자기 촘촘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내야 하는 수준이 된다.
거짓말은 크든 작든, 심리적이든 재정적이든 어떤 이득을 위해 하게 된다. 거짓말을 하는 게 내게 나은 결과이기 때문에(또는 어떤 걸 피하기 위해) 하는 것.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만, 그렇게 좋은 투자 방식이 아니다. 비용이 제법 계속 든다. 점점 살이 붙는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계속 신경 써야 하고, 걸릴 틈이 없게 이것저것 조심해야 한다. 생각에 쏟을 여력과 알리바이 조성을 위해 들어갈 노력은 다른 데에 쏟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거기에 거짓말을 들켰을 경우에 잃을 신뢰는 때에 따라 값을 메기기 어렵다. '정직'하게 말하면 됐을 걸, 굳이 숨기고 숨기다 들키면 무엇을 말해도 변명이 된다. 우리는 이 사람이 내게 거짓말했다는 걸 명백히 알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이제 그대로 믿지 못하게 된다. 잃는 것은 거짓말의 질에 비례한다. 내가 택시 기사님에게 했던 것 같은 거짓말은 아무 문제없이 넘어갈 수도 있지만, 친구들이 각자 일이 있다고 한 뒤 나를 빼고 따로 모여서 놀았다는 걸 알게 되면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누구나 거짓말을 하지만, 악의적으로 속인단 생각이 드는 사이엔 신뢰가 있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걸 100%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건, 다들 알고 있다. 단 우리는 어떤 중요한 이슈들에 있어, 서로를 속이지 않을 거란 믿음을 서로에게 요구한다. 그 위에 관계가 쌓이는 거니깐.
한 번의 거짓말로, 그 사람의 어떤 속성이 유추되기도(착각일지라도) 한다. 한 번 바람을 피운 사람에게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이 거짓말해서 얻으려는 그것이 나와의 관계보다 중요하다는 거니깐.
이런 것 때문에 거짓말을 당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주로 덮고 끊어버리는 걸 택하는 것 같다. 거짓말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알면 그것대로 기분이 나쁠 것 같고 그런 것들을 다 알면 앞으로 잘 못 지낼 것 같아서. 친구에게 돈 빌려줄 때는 없어도 될 만큼의 돈을 그냥 주라고 하는 선배들의 말엔 그 돈으로 신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어떤 거짓말도 그렇다. 묻고 따지지 않고 손절하게 되는.
가능한 정직한 게 낫다는 생각으로 정리됐다. 정직하게 말하면 손해 본다는 생각,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가능한 속이려 하지 않고 말해보려 한다(아! 그렇다고 또 일부러 민감한 것들을 물어보면 거짓말하겠지만(다들 그럴 거면서!)). 당장엔 뭔가 잃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그게 쌓이면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신뢰는 한창때의 비트코인처럼 한 번에 크게 얻을 수 없다. 꾸준히 잃지 않고 쌓아가는 게 답인 듯하다. 돈도 그렇지만, 특히 신뢰를 두고 투기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