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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Jun 15. 2019

문득, 그는 꼭 그래야만 했을까?

오늘 아침 한 강의를 들었다. 무료지만 인기 있는 주제여서 금방 마감이 됐다. 대기도 많아서 취소할 거면 꼭 해달라고 연락도 왔다. 조금 늦게 도착해 강사 이름을 못 들었다. 그는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자신과 기존 강의가 무엇이 다른지 자신 있게 비교하며, 비판했다. 


그런데 그에게 자신감 이상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욕이 아니라지만, 개새끼니 등신이니 욕을 계속했다. 나는 뒤에 있어, 앞에 있는 분위기를 잘 못 느꼈지만, 욕이 나올 때마다 표정이 안 좋은 이들이 있었나 보다. 


경상도에서 강의할 때는 이 정도 표현은 괜찮은데, 서울에선 욕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여서 강의하기 어렵다고, 자기는 중학생 남자아이들이 있어 그런 것도 같다고 이해를 구했다. 또 설명할 때 '나쁜 놈' 정도로 하면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어 일부러 표현을 강하게 한다고도 했다. 그는 2시간 동안 욕을 하고, 표현이 거친 점을 사과하는 걸 반복했다.


설명을 위해 꺼낸 비유들은 욕보다 이상했다. 맨 앞에 앉은 한 남성 분에게 퇴근길에 아내에게 갈지, 새로 생긴 여자 친구에게 갈지 물었다. 이 질문을 듣고 놀라서 ‘미친놈인가?’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소리 내어 욕한 일이 거의 없는 편인데(그러고 보니 나도 욕했구나..). 몇몇 사람들이 웃었다. 그래서 강사는 자신이 제법 유머러스하게 강의를 휘어잡는다고 여긴 듯했다.


남성 분은 아내라고 답했지만, 강사는 당연히 여자 친구 아니냐며 설명을 이어나갔다(물론 이해를 위한 예라고 거듭 말했지만). 그 후에는 어제 본 야동을 스토리로 봤냐, 당연히 감정적인 부분만 보지 않겠냐는 비유도 했다. 쉬는 시간 직전에 한 여성 분에게 이렇게 이쁜 데 결혼을 왜 안 하냐는 질문을 4번 정도 한 건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다. 중간중간 건질 팁이 있었지만, 점심시간이 될 때 아예 나왔다. 더 듣는 건 모든 면에서 낭비 같았다. 뒤범벅이 된 음식물 쓰레기 통에서 뭘 건져 먹기 어려운 거니깐.


<말죽거리 잔혹사> 중


특강을 꽤 들어서 짬밥이 있는 내게도 처음 보는 강사 유형이었다. 40년 전 남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영어 선생님이 그나마 비슷하달까. 실제 강의에서 욕부터 그런 비유를 꺼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원래 볼 수도 없는 게 맞고.


강연 업계에도 있던 입장에서 볼 땐 이 강사가 앞으로 얼마나 갈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가장 잘 나가는 인기 강사들도,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 한 표현을 써서 욕을 먹고 고쳐 나가는 중이니깐. 물론 자기는 해당 주제로 한국에서 손꼽히는 강사라고 하니, 생각보다 더 갈 지는 모르겠다.


그는 꼭 그래야만 했을까? 란 생각이 든다. 그런 표현을 하지 않고서는 학생들의 '주의'를 끌 수 없다는 것은 여러모로 큰 문제일 것이다. 설령 욕을 쓰지 않고, 쓰고 싶은 그런 비유를 쓰지 않아 강의 자체가 덜 자극적이 된다 해도, 그래서 리액션이 안 나온다 해도 그게 더 오래갈 것이다. 그가 받아들일 지는 의문이지만.


그가 아내와 여자 친구 비유를 했을 때 내가 있던 뒤에서는 나 외에도 짙은 탄식이 들렸다. 그들도 나처럼 오후에 집에 갔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그 탄식의 크기는 앞으로 더 커질 것이고, 그분이 스스로 고치지 않는 한 설 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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