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랜드>의 말들
사랑과 세속적 현실은 공존할 수 없는 걸까? 현실적 사랑에는 조건들이 필요하다. 그 조건들 가운데 1순위는 단연코 돈이다. 처음의 질문을 좀 더 직설적으로 바꿔보자. 돈 없이 과연 사랑이 가능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서 돈 없는 사랑이란 마치 신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유니콘 같다. 그래, 아름다운 세상 어딘가에 분명 그런 사랑도 존재하겠지. 세상이 아주 삭막한 건 아니잖아. 그렇게 믿고는 있지만 두 눈으로 아직 본 적은 없다.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던 재벌 2세 왕자와 가난한 캔디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마저도 진부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어찌 보면 가난한 캔디가 모진 핍박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남자가 재벌 2세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값비싼 옷과 가방과 구두로 캔디를 꾸며주고 화려한 파티에 데려가 주며 시시때때로 사랑의 이벤트를 펼치지 않나. 그게 다 돈이 있어야 하는 짓거리다. 그러니 한없이 순수해 보이는 우리의 주인공 캔디도 왕자의 돈이 없었다면 금세 나가떨어졌을 일이다.
흙수저인 두 사람이 만나 같은 꿈을 꾸며 사랑하고 있다. 이들의 운명을 한번 점쳐보자. 경우의 수는 많겠지만 그중에 몇 가지만 상상해보겠다. 하나. 두 사람 모두 꿈을 이루고 대박이 나서 부자가 된다. 그들은 성공 후에도 변함없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 둘. 둘 중의 한 사람만 꿈을 이루고 성공한다. 성공한 쪽은 바람 같은 건 피우지 않고 힘들 때부터 함께 한 연인을 여전히 사랑한다. 성공하지 못한 쪽도 질투심이나 열등감 없이 연인의 성공을 기꺼이 축하해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산다. 셋. 둘 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흙수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잘 산다.
세상사, 이렇게 스토리가 전개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고 모든 연인들이 돈만 밝히며 이별하고 헤어지진 않겠지만 갈등의 굴곡마다 돈이 끼어든다는 것을 부정하긴 쉽지 않다. 영화 <라라랜드> 속 미아(엠마 스톤 분)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도 마찬가지다. 배우가 되고 싶은 미아와 재즈클럽을 운영하고 싶은 세바스찬은 가난하지만 꿈이 있다. 예술은 두 사람의 영혼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그들의 꿈과 예술을 향한 의지는 거짓이 아니다. 그들의 순수한 욕망은 세속적 현실로부터 그들을 분리시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게 했다. 우주로 날아올라 별 속에서 함께 춤을 추는 세계, 이것이 바로 미아와 세바스찬이 만들어낸 세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미아는 오디션에 계속 떨어지고 야심 차게 준비한 1인극은 보기 좋게 망한다. 세바스찬이 고집스레 지키고 싶은 재즈는 이미 대중이 원하지 않는, 따라서 돈이 되지 않는 한물간 음악이 되어버렸다. 정통 재즈를 공연하던 카페는 스페인 음식인 타파스를 팔며 삼바 음악을 들려주는 정체모를 카페로 변해버렸다. 두 사람의 미래는 현실 앞에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엄마, 그는 재즈클럽을 열 거야. 정말 멋질 걸. 아니 아직 개업은 안 했어. 저축하고 있는 것 같아. 고정적인 연주는 없어. 하지만 곧 생길 거야. 요즘 좀 힘든 거지. 어쨌든 클럽을 열 거고 엄마도 맘에 쏙 들 거야."
엄마와 통화 중이던 미아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된 세바스찬은 고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밴드에 들어간다. 음반을 내고 투어를 하며 돈을 버는 밴드의 특성상 미아와 세반스찬은 떨어져 있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하던 어느 날 갈등이 폭발한다.
미아 : "그 밴드에서 하는 음악 좋아?"
세바스찬 : "글쎄,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미아 : "중요하지. 자기 꿈을 포기하는 건데."
(중략)
세바스찬 : "어느 밴드든 들어가서 고정적인 일을 하길 원했잖아?"
미아 : "물론 그랬지. 고정적인 일을 하면서 자기를 돌보고 클럽도 하길 바랐지."
세바스찬 : "원하는 대로 하고 있잖아."
미아 : "왜 클럽 안 해?...... 그동안 번 돈으로 클럽을 하라는 거지."
세바스찬 : "아무도 안 올 거랬잖아. 아무도 재즈 안 좋아해."
미아 : "자기가 재즈에 열정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올 거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열정에 끌리거든."
세바스찬 : "내 경험으론 아니야! 어찌 됐든 나도 이제 철 좀 들어야지..."
요즘 세상에서 철이 든다는 것은 돈 무서운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고로 철이 든 연인들은 철을 얻은 대가로 사랑을 잃는다. 국어사전에서 '철'이라는 단어는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되지만, 어쩐지 철이 들었다고 해서 지혜가 생기는 건 아닌 것 같다. 철이 들수록 더 뒤죽박죽 대고 미로에 갇혀 길을 잃는다.
혼돈 속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은 조금씩 자신들의 길을 찾아간다. 현실적인 상황은 그들을 멀어지게 했지만 꿈과 예술의 세계에서 그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마지막 미소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아련하고 애틋하지만 동시에 성숙한 어른의 얼굴이다. 철이 든 자의 세계다.
어릴 적에는 '그것만이 내 세상(들국화 노래)'인 줄만 알았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그 또한 내 삶인데(조용필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냉혹한 현실과 순수한 사랑 사이 그 어디쯤, 우리가 서 있는 좌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엔 영화 속 미아의 노래 '오디션'처럼 꿈꾸는 바보들도 필요하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자본가도 필요한 법이니까.
미아 : "우린 어디쯤 있는 걸까?"......
세바스찬 :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