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산타가 아니에요

영화 <500일의 썸머>의 말들

by 조혜영

누군가는 말한다. 사랑은 마치 교통사고와 같다고. 사랑도, 교통사고도 예측할 수 없이 찾아오는 우연 발생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그 우연은 순간순간의 필연이 중첩되면서 일어난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시작하게 된 연인이 있다고 해보자. 사건이 발생한 현시점에서 과거로 화면을 돌려보면 어떠한가.


만약 그때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면 과연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옆좌석에 앉은 부부가 큰소리로 싸우지 않았다면? 그래서 자리를 옮겨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만약 그 기차를 타지 않았다면?(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셀린과 제시는 이렇게 운명처럼 만났다.) 이런 식으로 과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탄생의 순간까지 이어진다. 그런 이유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난 말이야, 너를 만나려고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아."


사랑에 빠진 것이 운명이라면, 너를 만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필연이다. 영화배우이면서 감독, 소설가이기도 한 에단 호크는 그의 첫 소설 <이토록 뜨거운 순간(The Hottest State)>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 주인공 윌리엄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언젠가... 너도 누군가를 만난다면 네가 과거에 뭘 했든지, 네 지나온 인생이 어떠했든지 간에
그 모든 일들이 다 옳았단 걸 인정해야만 할 거야. 아무것도 너무 나쁘거나 지나치게 잘못되진 않았다는
걸 말이야. 왜냐하면 너의 과거가 너를 그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끌어주었으니까."


너를 만나 사랑에 빠진 우연으로, 내 모든 과거 삽질과 흑역사가 필연이 된다니...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깨끗이 싹 다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들마저 너를 만나기 위해 반드시 일어났어야만 하는 일들이었다니... 그리하여 사랑은 회개가 되고 구원이 된다. 내 미천한 과거를 성스러운 순교로 만들어버린다. 그렇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붙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믿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운명'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운명이라는 믿음을 붙잡아도 되는 걸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데... 할 일이 많다면 만날 사람도 많을 텐데... 과연 '너' 하나를 만나려고 그 고생을 하며 엄마 뱃속을 기어 나온 걸까?

200A98254ABC900D67 영화 <500일의 썸머>의 '썸머(조이 데샤넬 분)' (출처:다음 영화)

사랑과 교통사고의 또 하나 닮은 점은 '통증'이다.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주인공 썸머(조이 데샤넬 분)는 사랑 때문에 상처 받고 싶지 않다. 잠시 썸머와 썸머를 짝사랑하는 톰(조셉 고든 레빗 분)의 대화를 들어보자(참고로, 톰은 진정한 사랑을 찾기 전까진 행복할 수 없다고 믿는 쪽이다).


썸머 : "남녀가 만나게 되면 누군가 상처를 입죠... 우린 젊고 아름다운 도시에 사니까 심각한 건 잠시 미뤄두고 순간을 즐기며 살아야죠."
톰 : "그러다 사랑에 빠지면요?"
썸머 : "정말 그런 걸 믿어요?"
톰 : "사랑은 산타가 아니에요."
썸머 : "그렇다면 사랑이 뭐죠?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은 못해봤는데, 열에 아홉은 이혼해요... 사랑 같은 건 없어요. 환상이죠."
톰 : "당신이 틀렸어요."
썸머 : "정확히 어디가 틀렸다는 거죠?"
톰 : "언젠가 알게 될 거예요. 그걸 느꼈을 때..."


톰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산타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의심의 영역이 아니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필연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톰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톰은 '가볍게' 만나고 싶다는 썸머의 제안을 '기꺼이' 수용해 '진지하게' 그녀를 사랑한다. 그런 톰에게 통증도 필연처럼 찾아온다. 썸머와의 이별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 긴 머리칼, 귀여운 무릎, 목에 있는 하트 모양의 점, 섹시하게 입술을 핥는 모습, 귀여운 웃음소리는 이별 후에 이렇게 변한다.


"그녀를 증오해. 울퉁불퉁한 치아, 촌스러운 머리, 튀어나온 무릎, 징그러운 벌레 같은 점, 더럽게 입술을 핥아대고, 천박한 웃음도 싫어..."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는 숭고한 운명이 고작 너 따위를 만나려고 태어난 건 아니라는 타락한 분노로 전락한다. 참으로 얄팍한 사랑이다. 썸머가 불렀던 노래 제목 <슈가 타운(Sugar town)>처럼 운명은 달콤하지만 이별의 눈물에 금세 녹아내리고 끈적이는 통증만 남는다.

189e3fa5ef3136381e2d85fef345aa3654a39b0f 영화 <500일의 썸머>의 '톰(조셉 고든 레빗 분)' (출처:다음 영화)

아이러니하게도 이별 후에 썸머는 톰이 말한 진짜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고, 운명처럼 다가온 남자와 결혼한다. 이제 톰은 딜레마에 빠진다. 자신의 운명적 상대라 믿었던 여자에게 다른 운명의 남자가 있다는 것.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픈 만큼 성숙해진 톰은 이제 믿음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아버린 일곱 살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믿었던 사랑이란 것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일 뿐이었다고. 순진한 믿음을 걷어낸 후에야 산타의 선물 같은 진짜 사랑을 만날 수 있다고.


그렇게 톰은 '썸머(Summer)'를 떠나보내고, 교통사고처럼 '어텀(Autumn)'을 만나게 된다. 어텀은 톰의 운명적 사랑일까? 그건 아직 모른다. 다만 썸머를 향한 톰의 짝사랑 흑역사는 어텀을 만나기 위한 필연이었다는 것만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진실이다. 막 어텀과 사랑에 빠진 톰에게는 비밀이지만, 어텀(Autumn) 다음에는 윈터(Winter)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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