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은 공사 중입니다

영화 <만추>의 말들

by 조혜영

놀이공원은 시작하는 연인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다. 따지고 보면 연인들이 놀이공원을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한 공간 안에 연애를 위한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다고 할까. 일단 놀이공원은 화려하다. 사랑을 방해하는 구질구질한 일상의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놀이공원에서라면 세상살이 걱정을 잊게 된다. 일하지 않아도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냥 무조건 놀기만 하면 된다. 그 이름도 찬란한 '놀이' 공원 아닌가. 놀거리도 스펙터클 하다. 동심으로 돌아가 회전목마를 타고 놀 수도 있고,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타며 공포의 순간을 즐길 수도 있다. 어느 실험 결과가 말해주듯, 놀이기구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리는 심장을 상대를 향한 설렘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 아무리 봐도 이득이다.


이런 상황도 한번 생각해보자.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 놀이공원을 방문했는데 마침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을 보게 된다면. 아니면 이미 폐업한 지 오래된 놀이공원이라면. 실망하며 연인의 손을 잡고 다른 놀거리를 찾아 발길을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그런 장소가 더없는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영화 <만추>에서 훈(현빈 분)과 애나(탕웨이 분)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화려한 놀이공원의 불빛이 너무 눈부신 사람들이다.

1823E4414D6AA6D329 영화 <만추>의 한 장면 (출처:다음 영화)

영화 속 애나의 상황은 처절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남편의 폭행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현재 7년째 수감 중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3일간의 휴가를 받고 나왔다. 쇼윈도에 걸린 화려한 옷을 사 입고도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여 공중화장실에 걸어놓고 나오는 애나. 그런 그녀와 반짝이는 놀이공원 사이에는 어쩐지 간극이 있다.


애나만큼의 가혹한 운명은 아닐지라도 살다 보면 누구나 자신의 원래 인생으로부터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시내 중심가보다 변두리 골목이 더 편하게 느껴질 때, 값비싼 커피보다 자판기 커피가 더 따뜻한 위로로 다가올 때... 이 거대한 세상에 비해 한없이 작아진 나를 어쩌지 못할 때, 이미 작아진 나임에도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 자꾸만 몸을 움츠리게 될 때... 그럴 때 아무도 찾지 않는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쩐지 그곳에서만은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펼쳐내도 좋을 것 같았다. 마치 놀이공원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공간인 것처럼 마음껏 숨 쉬며 뛰어다니면 행복할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손을 잡고서 말이다. 하일권 작가의 웹툰 <안나라수마나라>에서처럼 폐업한 놀이공원에 살고 있는 마법사를 만난다면 더없는 행운일 테다.


우연히 만난 훈을 따라 공사 중인 놀이공원에 들어가게 된 애나는 훈 덕분에 닫혀있던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된다. 범퍼카를 타던 두 사람에게 환상처럼 보이는 이국적인 남녀, 그들의 모습을 연극을 보듯 지켜보던 훈과 애나는 외국영화를 더빙하는 성우들처럼 자기만의 언어로 대사를 말하기 시작한다.


애나 : "당신의 용서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난 당신의 사랑을 원해요."
훈 : "뻔뻔한 여자로군."
애나 : "그래요, 난 뻔뻔해요. 하지만 이렇게 만든 건 당신에요. 당신은 말했지요, 돌아오라고."
훈 :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애니 : "아니, 했어요. 당신의 눈빛이, 당신의 손길이 내게 돌아오라고 했어요. 꼭 말로 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훈 : "가봐야겠어. 이제 당신의 행복은 당신에게 달린 거야."
애나 : "어쩜 그렇게 잔인할 수 있어요."


훈과 애나의 이 말들은 각본 없는 발화다. 마치 연극치료를 하듯 느껴지는 대로, 말이 내뱉어지는 대로 흘러나온다.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상처들이 다른 캐릭터를 빌려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요란한 놀이공원이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말들이다.

1123E4414D6AA6D52D 영화 <만추>의 한 장면 (출처:다음 영화)

영화에서 훈과 애나의 사랑은 해피엔딩은 아니다.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진 운명을 잘 버텨낸 두 사람이 새로 문을 연 화려한 놀이공원에서 여느 연인들처럼 신나게 웃고 소리 질렀으면 좋겠다. 삶의 진짜 공포 말고 가상의 공포 속에서 두려워하다 서로의 품에서 한껏 긴장을 풀 수 있길 바란다.


삶의 벽 앞에 무너져버린 이들에겐 서로를 일으켜 세워줄 연인이 필요하다.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은 그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른다. 그들을 위해 세상이 먼저 말을 꺼내 주어야 한다. 환대로 그들을 맞아주어야 한다. 놀이공원은 공사 중이지만 어서 들어오라고. 이미 폐업한 놀이공원이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놀다 가라고. 훈과 애나가 탔던 오리 버스의 관광 가이드처럼 시끄럽게 요란하게... 그래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하던 그들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진짜 말을 내뱉을 수 있도록 말이다.


"자, 모두들 오리 소리 내고 박수! 꽥꽥 재미있죠? 여기 오리 버스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리 버스에 두고 간다! 주위를 보세요. 오늘따라 날씨가 아주 좋네요...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후딱 갑니다. 즐기세요, 마음을 열고 지금 사랑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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