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좀 꺼져줄래?

영화 <건축학개론>의 말들

by 조혜영

연애할 때 우리는 시인도 되고 음악가도 되지만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상대의 말이 어떤 맥락에서 말해진 것인지, 친절하게 내뱉은 문장 뒤에 어떤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할 때 우리는 언어학자가 되어야 할 때도 있다. "뭐 먹을까?"라는 질문에 "아무거나"라고 답한 연인의 말이 그저 '기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거나"라는 말에는 어마어마한 '기의'가 숨겨져 있으니까. 맛있고 분위기 좋고, 오늘의 데이트를 둘만의 파티로 만들 수 있는...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게 플레이팅이 예뻐야 하는 건 당연하고... 등등의 미처 내뱉지 못한 말들이 "아무거나"라는 짧은 말 안에 다 들어있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이라면 더욱 그렇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제훈 분)과 서연(배수지 분) 사이에 오고 가던 대화를 한번 살펴보자.


승민 : "너 서클에서 인기 많다며? 그럼 남자친구도 있겠네?"
서연 : "없어. 그딴 거."
승민 : "그동안 뭐했냐? 남자친구도 없고?"


"그럼 남자친구도 있겠네?"라고 조심스레 묻는 승민의 말은 사실 "나, 너한테 관심 있어. 너를 좋아해."라는 말이다. 남자친구가 없다는 서연의 말에 살짝 들떠서 "그동안 뭐했냐? 남자친구도 없고?"라고 한 말은 "네가 남자친구가 없어서 너무 다행이야. 네 남자친구로 나는 어때?"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남자친구를 "그딴 거"라고 쿨하게 표현한 서연은 사실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있는 거다.

1126C6474F0E91FE0B 영화 <건축학개론>의 승민과 서연 (출처:다음 영화)

연인들의 말이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연애는 일종의 심리게임이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게임이다. 상대에게 진심을 먼저 들켜서는 안 된다. 내가 얼마나 너를 보고 싶었는지, 네 연락을 기다렸는지, 너를 사랑하는지 먼저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말을 먼저 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연애초보이거나 연애고수다. 연애초보에겐 가진 패를 다 보이는 미숙한 말이지만 연애고수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상대가 듣길 원하는 말을 먼저 해줌으로써 관계 우위를 점하는 전략이다. 때로 이런 기술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차원에서 일어난다.


사실 연인들의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보다 더 복잡한 맥락이 존재할 때가 많다. 사회적 계급이 만들어내는 수치심과 자존심, 욕망과 질투, 그로 인한 방어기제 같은 것들이 미묘하게 엉켜있을 때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사는 동네에 따른 힘의 역학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보광동이 어디 있느냐는 교수의 질문에 강남 사는 재욱(유연석 분)은 고개를 갸웃한다.


"제가 강북은 잘 몰라서..."


강남 사는 잘 생긴 남자와 강북 사는 평범한 남자가 동시에 한 여자를 좋아한다면 누구에게 승산이 있을까. 여자는 아직 강남에도 강북에도 속해있지 않다. 제주에서 갓 서울로 올라와 아빠 친구 집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강남 혹은 강북의 세계에 속하게 될 것이다. 과연 여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서연 : "난 아나운서 될 거야. 그래서 라디오 디제이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엄청 유명해질 거야."
승민 : "아나운서가 돈 많이 벌어?"
서연 : "아닌가? 적어도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할 걸?"


서연의 말에 강북 사는 평범한 남자 승민의 표정이 굳어진다. 자신이 입은 티셔츠가 'GUESS'가 아닌 'GEUSS'라는 것에 대해 강남 사는 재욱과 서연이 비웃듯 말하는 것을 들은 승민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느낌이 된다. 순댓국을 파는 억척스러운 엄마도, 엄마가 냉장고에 처박아둔 검정 비닐봉지 속 궁상맞은 음식들도, 오래된 집의 낡은 철문도 다 꼴 보기 싫고 창피해진다. 급기야 서연에게 진심을 고백하려던 날 밤, 술에 취한 서연과 재욱이 함께 서연의 집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승민은 절망한다. "나, 널 좋아해"라고 연습하던 말은 "이제 좀 꺼져줄래?"라는 말로 변한다. "열라 귀엽고 졸라 예쁘던" 서연은 하루아침에 "썅년"이 된다. 사실 승민의 깊은 곳에는 차마 꺼내진 못한 이런 말들이 있었을 것이다.


"너 왜 술에 취해서 재욱 선배가 네 집에 들어가게 했어?"

"둘이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지?"

"나 널 좋아해. 그래서 네가 재욱 선배와 친하게 지내는 게 싫어."


서연도 마찬가지다. 서연의 깊은 마음 안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았을까.


"너 왜 나한테 꺼지라고 했어? 너, 나 좋아하잖아? 나도 널 많이 좋아해."

1626C6474F0E92050D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하는 승민과 서연 (출처:다음 영화)

승민과 서연은 서로의 진심을 내뱉지 못하고, 시작도 못해본 채 오해 속에서 그렇게 헤어진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서연은 승민에게 "네가 내 첫사랑이었어"라고 털어놓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승민이 알량한 자존심과 방어기제에서 벗어나 서연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잘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서연 : "우리 서클에서 재욱이 오빠 안 좋아하는 애들 없다."
승민 : "재욱이 형이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데?"
서연: "잘 생겼지, 키 크지, 집도 부자지... 게다가 건축과잖아. 난 건축하는 사람 멋있는 거 같아."
승민 : "저기, 첫눈 오는 날 뭐해?"
서연 : "첫눈, 그거 언제 오는데?"
승민 : "글쎄... 보통 겨울에 때 되면 오는데..."
서연 : "우리 그날 만날까?"


건축하는 사람 멋있는 거 같다는 서연의 말 속에 "나, 네가 마음에 들어"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는 걸 승민이 알았다면...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서연의 말 역시 "너, 나 좋아하는구나? 나도 너랑 사귀고 싶어"라는 의미였다는 걸 진작에 눈치챘다면... 류시화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평범하고 순진했던 스무 살의 승민에겐 많이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강남과 강북의 이분법 세계에서 늘 강북 쪽에 속해있던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듯 말이다.


결국, 결론은 이렇다. 사실 연애의 진짜 승자는 진심을 말하는 자다. 설사 그 고백이 좌절로 끝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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