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중경삼림>의 말들
세상에는 실연을 노래한 수많은 노래들이 있다. 대체 사랑이 뭐길래? 이별이 뭐길래? 이토록 지구인들의 가슴을 젖게 한단 말인가. 일찍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붓다가 세상 모든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은 없다고 그렇게 말했거늘 불쌍한 우리들은 기어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고 만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준비되지 않은 실연은 재난이다. 그 재난이 더욱 고통스러운 이유는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에게만 들이닥친 일이기 때문이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에서처럼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는 것이다. 실연을 당한 사람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떠나간 연인의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든지, 아니면 연인이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워가든지. 하지만 실연을 당해본 사람은 안다. 이미 변해버린 마음을 돌리기란 지구의 자전 방향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러니 어찌 됐든 부재의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실연당하면 난 조깅을 한다. 조깅을 하면 몸속의 수분이 모조리 빠져나가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5년 사귄 여자친구 메이에게 버림받은 경찰 223(금성무 분)은 조깅으로 이별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그가 시간을 견디는 또 다른 방법은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통조림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헤어진 날은 하필 만우절이어서 나는 그녀가 농담하는 걸로 알았다. 농담이 한 달만 가길 바라며 헤어진 그날부터 난 매일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샀다. 메이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좋아했다. 5월 1일은 내 생일. 30개의 통조림을 다 샀을 때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랑의 유통기한도 끝이다."
헤어진 지 30일이 지난 후, 경찰 223은 어떻게 됐을까. 매일매일 사모은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를 자신의 생일 만찬으로 다 먹어치운 뒤 배탈이 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메이에게 난 파인애플 통조림과 다를 바 없었다고. 경찰 223과 메이의 사랑의 유통기한은 4월 1일이었던 거다. 아무리 거짓말 같았어도 4월 1일이 맞았던 거다. 공산품도 아닌데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 서글프게 다가오지만 어쩔 수 없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은 몸에 해롭다.
경찰 663(양조위 분)도 사랑을 잃었다. 경찰 663은 혼잣말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연인이 부재한 방 안에서 사물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그녀가 떠난 뒤로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슬펴 보여서 물건들을 위로한 후에야 잠에 든다고 했다.
To.오래 써서 닳아버린 비누에게
"너무 야위었어. 전에는 훨씬 뚱뚱했는데 지금은 말랐어. 왜 그래? 자신감을 가져."
To.물에 젖은 수건에게
"그만 울어. 계속 울기만 할 거야? 강해져야지. 왜 이렇게 축 쳐져 있어. 정말 못 봐주겠네. (젖은 수건을 꽉 짜서 널며) 이제 기분이 좀 괜찮지?"
실연당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무너진 시간들을 견디는 중이다. 이별에도 매뉴얼 같은 게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컵라면 먹는 방법처럼 쉽고 간단한 걸로 말이다. 뚜껑을 열고 수프를 넣는다. 선 높이까지 물을 붓는다. 젓가락을 올려놓고 3분간 기다린다. 3분 후 면이 알맞게 익으면 먹는다... 하지만 실연을 견디는 시간에 매뉴얼 따위 있을 리 없다. 떠나간 연인을 잊는 최적의 방법이란 없다. 텅 빈 시간 동안 그저 뭐라도 하는 것. 설사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를 먹어치우고 사물에 말을 거는 조금 이상한 짓일지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백배 나은 일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 생각을 받아 적어도 좋겠다. 그 말들은 그대로 시가 되고 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유통기한이 영영 끝나지 않길... 만일 기한을 적는다면 만년 후로 해야겠다."
- 경찰 223
"(방구석에 팽개쳐져 있던 흰색 셔츠를 발견하고는) 숨어서 뭐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이런 데 숨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야지. 곰팡이잖아? 내일은 햇빛을 보여줄게."
- 경찰 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