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딱한 커플이 돼가는 걸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말들

by 조혜영

이별에도 전조증상이 있다. 갑자기 연락이 뜸해진다든가, 만나도 휴대폰만 본다든가, 별 거 아닌 일에도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온다든가 하는 것들이 대표적인 전조증상이다. 신호는 주로 식당에서 감지된다.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한다. 자동반사적으로 모이를 입에 넣는 닭들처럼 제 앞에 놓인 그릇에 목을 쭉 빼고 그저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 커플의 말풍선에는 어떤 말들이 오고 갈까?


"또 중국집에서 저녁을 때웠다. 우리도 딱한 커플이 돼가는 걸까. 둘이 멀뚱하게 앉아 먹어대기만 하는... 그건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해"

-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짐 캐리 분)의 일기
2c436ee27c085beb91539b2f2a65bdad653dc280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멘타인과 조엘 (출처:다음 영화)

서로 죽고 못 살던 커플은 어떻게 이별에 이르게 되는 걸까? 모든 것이 다 빌어먹을 호르몬 때문일까.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상대의 가장 마음에 들었던 모습 때문에 결국 이별에 이른다고. 과묵해서 좋았는데 너무 말이 없어서 헤어지고, 자유로워 보여서 좋았는데 너무 막 나가서 헤어지고, 잘 생겨서 좋았는데 그 뻔지르르한 얼굴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다. 판타지는 끝나고 왕자(혹은 공주)의 실체가 드러난다. 마법에서 풀려난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는 게 아니라 왕자가 마법이 풀려 개구리로 돌아온 꼴이다.


왕자(혹은 공주)인 줄 알았던 상대가 실은 개구리였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우리는 분노에 휩싸인다. 상대의 보잘것없는 민낯을 향해 첫 번째 화살이 날아가고, 그런 인간을 사랑했던 바보 같은 자기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이 날아가 박힌다. 그때 우리는 지상 최대의 악담을 쏟아낸다.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너 같은 거, 아까 그 벼룩시장에 버리고 올 걸." - 클레멘타인이 조엘에게
"내 보기엔 너 뒹굴고 왔어. 넌 친해지려면 일단 자고 보잖아." -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세상의 모든 잔인한 말은 연인들 사이에 존재한다. 사랑의 절정을 지나 거짓말처럼 들이닥친 권태의 시간... 그 지루함을 어쩌지 못해 잔인한 말로 균열은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말은 늘 흔적을 남긴다. 잔인한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긋난 관계는 악몽이다. 함께 했던 좋은 기억마저 한 편의 사기극으로 만들어버린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그 사람과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처럼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가 있다면 기꺼이 적금이라도 깨리라.


"너무 따분한 것도 지우는 이유가 되나요? 그 사람 때문에 제가 많이 변했어요. 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제 자신이 싫어져요. 보는 것조차 힘들어요. 가소롭고 비굴한 미소라니..."


그렇게 클레멘타인은 조엘과의 기억 회로를 삭제한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말은 클레멘타인에게 당분간 유효해 보인다. 치매 환자처럼 하루아침에 자기를 못 알아보는 연인에게 배신감을 느낀 조엘. 조엘도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삭제하려 한다.


단, 문제가 있다면 애초에 기억이란 놈이 한 세트로 되어 있다는 것. 괴로웠던 기억을 삭제함과 동시에 행복했던 기억마저 자동 삭제되어 버린다. 그러니 당신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을 건네며 묻고 싶다. 지긋지긋한 기억을 삭제하고 좋았던 기억마저 잊어버리겠는가, 아니면 상처를 기억하는 대가로 한 때 행복했던 시간들을 간직하겠는가. 전자는 파란 약, 후자는 빨간 약이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나라면... 잠시 고민을 거듭한 후에... 빨간 약을 선택하겠다. 낭만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망각은 실수조차 잊게 만드는 특효약 일지 모르지만, 결국 똑같은 실수를 또 하게 만드는 저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상처의 시간과 행복의 시간을 영원히 함께 기억하려 한다.

91cb788652db4b745d95685065e43c3e2c6cfe11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 (출처:다음 영화)

그때, 너에게 했던 그 미친 말들은 진심이었지만 사실 진심이 아니었어. 네가 나에게 했던 못난 말들도 그랬겠지. 그때 우리는 참으로 딱한 커플이었지만 있잖아, 그날 그 낡은 중국집의 깐풍기는 진짜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말도 없이 닭처럼 그렇게 먹어댔던 거야. 그러니 너무 끔찍해는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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