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의 밑바닥으로부터

by 조혜영


봄이 되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잔디밭엔 작은 꽃들이 피어난다. 말 그대로 이름 모를 작은 꽃이다. 너무 작아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꽃잎도 보이지 않는 노랗고 파란 꽃들. 마치 초록색 바탕에 뿌려져 있는 색색의 점(點)들 같다. 홀씨를 품은 민들레가 잔디밭을 장식하는 날들도 있다. 신기했다. 내 무관심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 이후 서울에서 민들레 홀씨를 본 기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즈음 지어진 아파트 단지는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기쁨을 준다. 아무런 목적 없이 단지 곳곳을 거니는 일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다. 하루키가 말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랄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 안에는 또 다른 욕망이 있다. 큰 꽃, 최신식 아파트, 화려하고 거대한 기쁨으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것. 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크고 화려하지만 영원을 기약할 수 없는, 위태로운 행복 사이에서 표류 중이다.


두 가지 욕망을 나누는 경계에 ‘시선’이 있다. 타인의 시선. 정확히 말하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시선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글을 쓰는 일로 비유하자면 이렇다.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행위 자체에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미약한 에고를 부풀려 타인의 시선을 취함으로써 기쁨을 느끼려 하는가. 어떨 때는 전자였다가 어떨 때는 후자가 되기도 한다. 두 가지가 혼재되어 나조차도 헷갈릴 때도 있다. 끊임없이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을 쓰는 일이 나를 행복으로부터 멀리 데려갈 지도 모른다. 세상에 크고 화려한 것들은 많고, 나는 그것들에 쉽게 유혹 당한다.


학점 2.1, 토익 점수는 받아본 적 없고, 여자 친구도 있어본 적 없는 복학생 홍만섭. 다른 학생들이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열을 올릴 때 그의 관심은 오로지 족구뿐이다.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족구왕>의 주인공 이야기다. 그런 만섭에게 (만섭이 짝사랑하고 있는) 그 대학의 퀸카 안나가 말한다.


“여자 친구 만들고 싶고, 손도 잡고 싶으면 족구하지 말아요. 여자들이 족구 하는 복학생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요? 축구 같은 거야 선수들도 잘 생겼고 돈도 잘 벌고 몸도 좋고. 근데 족구는 더럽잖아요… 이름도 그래, 족구가 뭐야, 족구가. 족발도 아니고… 족구하지 말아요. 그러다 평생 혼자 살겠네.”


내내 바보 같이 웃기만 하던 만섭의 얼굴이 이내 진지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만섭의 대사.


“족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아요?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영화 <족구왕> 스틸컷


만섭은 영어 연극 수업에서 발표를 빌려 안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I love you. I love you from the bottom of my heart.”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는 진부하고 흔한 말이지만 만섭의 어설픈 발음 때문이었을까, 그날따라 단어 하나하나가 오롯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내 심장의 밑바닥으로부터’ 당신을 사랑합니다.”


순간 가슴 한 구석이 찌릿했다. 내 심장의 밑바닥이 건드려진 것이다. 표류 중이던 나는 부표를 발견했다. 심장의 밑바닥으로부터 사랑하는 것, 심장의 밑바닥으로부터 글을 쓰는 것, 심장의 밑바닥으로부터 살아가는 것… 그것은 거대하고 화려한 것에 유혹당하지 않도록 중심을 지켜주는 말이었다. 그것은 어떤 절실함, 간절함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가. 생의 마지막 순간, 지나온 인생을 돌아볼 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은 무엇일까.


타인의 시선보다는 내 심장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아직 밑바닥까지 도달하진 못했지만, 그 가까이에 내가 살고 있는 30년된 아파트가 있고 이름 모를 꽃들과 민들레 홀씨가 있다.


결국 만섭은 족구왕은 되었지만 안나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다. 심장의 밑바닥으로부터 시작한 일도 실패로 끝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만섭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심장의 밑바닥으로부터 글을 쓰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


어쨌거나, 다행이다. 만섭이 족구를 좋아해서.

나도 글을 쓰는 게 좋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말해주고 싶다.


저기요, 글을 쓰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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