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은 부모님 집에 전화를 하는 편이다. 특별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다. 부모님의 안부가 걱정돼서라기보다는 당신 딸이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당부 차원의 전화랄까. 죄송한 일이지만 아직은 건강하신 일흔의 부모님보다 올해로 95세가 되신 할머니의 안부가 더 궁금하다. 그럼에도 요즘 들어 할머니와의 통화가 그리 편치만은 않다.
“점심은 먹었니?”
“네. 먹었어요.”
“아침은?”
늦게 일어나 아점을 먹은 나로서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먹었다고 말한다.
“돈 아껴 써라. 쓸 데 없이 쓰지 말고. 돈도 잘 못 벌면서…”
아흔 넘은 노인네의 노파심 어린 말씀이라 여기며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데, 나는 이내 쏘아붙인다.
“할머니, 할머니는 왜 내가 돈을 잘 못 번다고 생각해요? 나, 돈 잘 벌어요.”
그러고는 속으로 말한다. 할머니가 미리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내가 돈을 잘 못 버는 거야. 곧 죽어도 내 잘못은 아니다. 다 할머니 때문이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이 전화가 할머니와의 마지막 통화가 되면 어쩌나 싶어 이내 후회막심이다.
경향신문에 실리던 손홍규 작가의 짧은 글을 거의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 글들을 모아 펴낸 산문집 <다정한 편견>에 ‘라면엔 계란’이라는 글이 있다.
고향집에 내려가면 밥을 먹게 되어 좋다. 밥상머리의 주된 이야깃거리는 대처에서 홀로 사는 아들 녀석 즉 가련하기 짝이 없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내가 대체 뭘 먹고 사느냐다. 어느 날 나는 생각 없이 라면 먹지요,라고 했는데… (중략) 어머니는 파나 양파 혹은 계란을 넣어 먹느냐고 물었고 나는 귀찮아서 그냥 라면만 끓여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때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라면엔 계란을 넣어야지! 라면만 먹으면 죽어! 어머니와 나는 화들짝 놀라 쥐었던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는데 정말 라면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장하게 여겨지는 고함 탓이었다. (중략) 그 뒤 라면을 끓일 때면 잊지 않고 계란을 한 알 넣어 먹는데 신기하게도 오래 살 것 같은 행복한 착각이 들곤 하는 거였다.
(손홍규 작가의 글은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적 완결성을 지니고 있어 중략을 하여 글의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글의 정서를 온전히 느끼고 싶은 분들에겐 일독을 권한다.)
처음이었다. 짧은 산문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을 흘렸던 것은. 글이 언어적 사유가 아닌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만난 적 있을 리 없는 작가의 아버지를 과거 어느 땐가 기어이 보았던 것 같은 확신이 들기도 했다. 그날의 아버지 목소리와 표정, 미세한 주름과 거칠게 내지른 호흡의 마지막 떨림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였다.
내가 왜 눈물을 쏟았는지 완결된 문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자신이 없다. 가족, 부성애 등으로 글 전체를 아우르기엔 단어의 불완전한 속성만을 통감할 뿐이다. 다만, 나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나의 할머니와 손 작가의 아버지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고 이야기의 맥락도 같지 않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 두 사람을 연결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문득 깨닫는다. 글이란 게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다시 묻는다. ‘그런 게’ 뭔데? 글이란 게, 그래서 어떤 건데?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그런 거 있잖아. 그냥 그런 거…
어쨌거나, 다행이다. 아직 ‘그런 거’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어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고, 표현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글쓰기를 멈출 수 없으니까.
오늘 점심엔 라면을 끓어먹어야겠다. 계란은 꼭 넣어야지. 글을 쓰려면 오래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