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이스>를 본 후, 몇 가지 질문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당신의 심장이 뛰는 이유?
일단, 이 질문을 먼저 하고 싶다. 나의 심장 그리고 당신의 심장이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답하면 스스로 알아서 일 잘하는 자율신경 때문? 그렇다. 태어났으니까, 혹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심장은 뛴다. 자율신경은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조용히 심장을 뛰게 한다. 하지만 내가 당신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어쩌면 이보다 좀 더 거창한 이유에 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당신의 심장이 뛰는 조금은 거창한 이유?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자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니까, 심장의 쉼 없는 노동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영화 <바이스>의 주인공이자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냈던 딕 체니에게도 심장이 있었다. 그의 심장도 우리의 심장과 마찬가지로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뛰고 또 뛰는 동안, 그의 심장은 알고 있었을까. 자신의 고된 노동이 세상을 위해 헛되이 쓰이고 있다는 것을, 고작 야심 많은 주인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낡아서 쓸모 없어지면 새 심장으로 금세 대체될 거라는 것을... (딕 체니의 심장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래서 차라리 그가 부통령이 되기 전 멈춰버렸다면 세상은 달라졌을까.)
대통령도 아니고, 미국 부통령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CAN 미국 부통령 change the WORLD?
영화 포스터에 적혀있는 질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린 답은 'YES'이다. (단,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답은 'NO'가 될 수 있다.)
부통령은 대통령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미국에서 부통령은 아무 힘도 없는 허수아비가 같은 존재다. 선거 전에는 대통령 후보자의 러닝메이트였다가 당선이 된 이후에는 대통령이 얼른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왜? 대통령이 죽으면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승계받아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딕 체니는 굳이 대통령일 필요가 없었다. 대통령이 죽기를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허수아비, 바보는 따로 있었으니까. 바로 조지 W. 부시.
딕 체니는 조지 W. 부시가 러닝메이트를 제안할 당시 '핼리버튼'이라는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의 CEO로 재임하고 있었다. "나 지금 CEO야. 큰 회사라고. 국방부 장관도 해봤고, 백악관 수석 보좌관도 해봤지만 미국 부통령은 너무 존재감이 없어..." 딕 체니는 조지 W. 부시의 러닝메이트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우리 '딕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조지 W. 부시를 찾아간 딕 체니는 역으로 제안한다. 부통령의 권한은 대통령이 주는 것이니 자신에게 '작은' 권한을 달라고. "관료들 관리감독에 군도 주무르고, 에너지 자원 관리에 외교 정책까지..." ('아주 작은' 권한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딕에게 치킨 다리를 뜯던 조지 W. 부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한다.
"그래. 우리 딕, 하고 싶은 거 다 해!"
당신이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장면에서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백악관에 입성한 딕 체니는 2001년부터 2008년 재임 기간 동안, 그야말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일은 대량살상무기를 명분 삼아 일으킨 이라크 전쟁. 그 무의미한 전쟁으로 인해 이라크 민간인 60만 명이 사망했다.
묘하게 겹쳐지는 MB의 추억?
영화 홍보지에 나온 정보들을 옮겨오면 이렇다.
+ 이라크 침공 다음 해 '핼리버튼' 주식 상승률, 500%
+ 딕 체니가 핼리버튼과 무관하다고 주장한 후(!) 벌어들인 스톡옵션, $10,000,000(한화 113.6억)
+ 딕 체니가 또(!) 핼리버튼과 관계없다고 주장한 후 받은 연봉, $150,000(한화 1.7억)
이쯤에서 자신은 BBK 사건 및 다스 등과 아무 관련이 없다던 MB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신이 내린 사나이?
<빅쇼트>의 제작자와 감독, 배우들이 다시 뭉쳐 만든 영화답게 <바이스>는 <빅쇼트>와 비슷한 톤으로 전개된다. 딕 체니를 잘 안다고 말하는, 딕 체니와 깊은 연관이라도 있는 듯한 한 남자가 화자가 되어 영화를 끌고 가는 전개, 리듬감 있는 편집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구성, 조소를 금치 않을 수 없는 블랙코미디적인 감독의 위트와 장난... 132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특히나 영화 후반부, 딕 체니와 깊은 연관이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던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이 부분은 스포일러라 말하지 않겠다) 딕 체니가 '신이 내린 사나이'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볼 따름이다. 여기서 다시 얼마 전 조건부 보석으로 풀려나 따뜻한 자택에서 새 봄을 맞이하고 있을 MB가 떠올랐다. 역시 신이 내린 사나이들은 운이 좋아. 이런 인간들을 지상으로 내린 신이라면 한 번쯤 그 신에 대해 의심해봐야 하는 건 아닐는지...
신념이란, 대단한 것일까?
그것이 올바른 것일 때에만 그러하다. 그렇다면, 신념이 올바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적어도 주관적인 세계관 안에서 자신의 신념은 무조건 옳은 게 아닐까? 딕 체니는 이라크 전쟁을 한 것에 대해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은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한 테러리스트로부터 자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아니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그러니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절대 사과하지 않겠다고.
다시 심장 얘기로 돌아와서, 어쩌면 신념의 옳고 그름에 대해 심장은 답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심장이 하는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인다면 잘못된 선택을 조금은 덜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딕 체니는 자신의 심장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점점 혈관이 막히고 굳어가는 심장... 심장은 심근경색이라는 이름으로 딕 체니에게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딕, 이건 아니야. 난 이제 못 해 먹겠어!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도모해보는 건 어때? 전쟁 같은 거 말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일 말이야...'
감독은 딕 체니가 심장의 신호에 귀 기울였다면 아마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장면을 영화 속에 삽입한다. 그는 가족과 함께 교외에서 살고 있다. 평화롭게 낚시를 하고, 골든 리트리버를 키우며... 중요한 건 그와 그의 가족이 미디어에 얼굴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딕의 심장은 건강해졌다고 한다. 디 엔드.
'Vice-President' or 'Vice'?
영화가 끝나고 흘러나오는 OST 속 가사는 자유의 나라, 꿈과 희망의 나라 미국을 찬양한다. 딕 체니는 '위대한 나라' 미국을 지배하길 원했다. 위대한 미국을 지배하는 자라면 얼마나 위대할까? 악의 축이 있다면, 절대 선의 자리도 존재하는 법. 딕 체니에게 그 자리는 미국이었고, 자신이었다. 부통령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vice-president'이지만, 'vice'는 그 자체만으로 '악(惡)'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악한 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본다면, 마지막 쿠키영상을 놓치지 말 것을 권한다. 어쩌면 이 영화를 포함해 이 영화 리뷰까지 모두가 한쪽에서 바라본 편협한 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건대 우리에겐 심장이 있다. 심장이 굳어가기 전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아담 맥케이 감독은 그 일을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