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리스>, 실종된 '사랑'을 찾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시대, 남겨진 두려움에 대한 잿빛 보고서

by 조혜영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두려움과 사랑은 결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랑 수업>이라는 책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신의학자인 저자 제럴드 G 잼폴스키는 '두려움과 사랑은 결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감정 중 무엇을 경험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햄릿에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였다면 어쨌든 살아남은 우리에겐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그것이 문제다.




사랑과 두려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영화 <러브리스>는 철저히 두려움에 관한 영화다. 제목처럼 사랑은 없다. 사랑을 사라지게 한 장본인이자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비집고 들어와 끈질기게 살아남은 두려움... 두려움은 세상을 차갑고 건조한 잿빛으로 물들인다. 영화의 시작, 러시아 어느 작은 지방의 숲 속에서 관객은 메마른 풍경과 마주한다. 습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 메마른 채 꺾여버린 나뭇가지와 잿빛 하늘, 음울한 호수, 아들 알료사가 다니는 학교마저 감독은 카메라의 움직임 없이 딱딱한 콘크리트 건물로써의 물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거기에 어떤 감정도 없다.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기도 전에 관객은 아무런 힘도 없이 그 스산한 풍경이 주는 정서를 고스란히 떠안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앞으로 2시간이 쉽지 않겠는 걸... (아, 영화를 잘못 골랐구나... 실제로 중간에 관객 몇몇은 자리를 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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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다행히 내가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의 서사가 보여주는 상징을 깨닫게 된 후부터다. 이혼을 앞둔 부부가 실종된 아이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의 굵은 서사는 전쟁과 종말로 상징되는 폐허의 시대, 과연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다. 실종된 아들 알료사는 '사라진 사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했다. 부부가 알료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만약 찾는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찾게 될 것인지, 그 이후 부부는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 또 만약 찾지 못한다면 부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이 모든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을 감독의 의도가 궁금했다. 감독의 메시지를 통해 나는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직은 실낱같은 사랑이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음을...


하지만 예상대로 기대는 빗나갔다. 감독은 철저히 사랑이 사라진 두려움의 세계를 보여주며 영화를 끝낸다. 삶의 외피는 사랑으로 보일지라도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 텅 빈 구멍은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원망하고 증오하고 분노하고, 또 그러면서 그토록 외로워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밀어냈다가, 혼자만 살아남아 고독해진다. 고독은 두려움을 만든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사랑'인가?


"우리는 서로를 수단으로 생각할 뿐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죠. 우리는 그저 사랑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말 중.


파트너가 먼저 잠이 들었을 때, 전화를 받지 않을 때, 나와 관련 없는 일로 바쁠 때 불안하고 외로움이 밀려온다면 그/그녀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 윤리와 규범만을 강조하며 아이를 훈육하는 부모는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반 학생이 실종된 지 며칠이 되었지만 퇴근 시간이 되자 무심하게 퇴근해버리는 선생은, 매뉴얼대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한들, 학생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사랑이란 이름의 사랑 아닌 모습들을 보여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나 선생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받은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인공 제냐는 말한다. 자신의 엄마는 기독교적 윤리로 훈육만 했다고.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제냐의 엄마는 여전히 실체 없는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제냐의 엄마를 그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제냐의 엄마의 부모? 그렇게 위로 올라가다 보면 궁극의 가해자를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랑 없음'은 가족의 까르마이자 인류 전체의 까르마 인지도 모르겠다.


사랑 없는, 고독과 두려움만 남은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감독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당신의 모습이다! 당신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짜일 뿐. 그리고 나아가 감독은 역설한다. 어때? 계속 이렇게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증오하고 원망하며 괴롭게 살아볼래? 아니면 어떻게든 진짜 사랑을 찾아볼래?


사랑, 누군가를 호명하기


영화에서 특별하게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경찰도 형식적인 대응만 할 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실종 사건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인물, 이반. 그는 실종 아동을 찾는 자원봉사단체의 일원이다. 이반을 비롯한 단체 회원들은 어떤 보수도 없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실종된 알료사를 찾아 나선다. 그들은 끊임없이 알료사의 이름을 부른다. 알료사! 알료사! 결국 알료사를 찾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마음이야말로 작은 사랑이 발현되는 순간이 아닐까.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랑은 있다는, 가냘픈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초반 홀로 숲 속을 거닐던 알료사가 나뭇가지에 묶어놓은 끈만이 사라진 알료사를 대신해 흩날리고 있다. 흩날리는 끈이 충분히 사랑할 수 있었음에도 놓쳐버린 시간을 자각케 한다. 그래서 씁쓸하다.


영화가 끝나고, 이제 모든 몫은 관객에게 돌아왔다. 자신의 실종된 사랑을 더 늦기 전에 찾아야만 한다는 미션을 건네받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 사랑 말이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 질문은 다시 시작됐다. 다행히 오늘 하늘은 잿빛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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