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거울

감정을 관찰하며 알게 된 것

by 출항일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의 감정을 밖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마치 내 마음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사람처럼.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의 이유가 궁금해졌다.
슬픈 건 왜 슬픈 건지, 기쁜 건 왜 기쁜 건지, 화가 난다면 그 화는 어디에서 오는 건지.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나는 내 감정을 바라보는 나 자신을 자주 발견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나는 매일 좋고 나쁜 다양한 감정에 노출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감정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그만큼의 감정을 소모하고 있던 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많은 생각 속에서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하지만 순례길을 완주한 뒤 포르투갈에서 방전된 배터리처럼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나는 이미 많은 감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산티아고 도착 후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가기 전, 포르투갈 여행에 대한 설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여행을 이어가기보다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게 예쁘다고 하는 포르투를 건너뛰고 귀국 일정을 앞당겼다.
리스본에서는 귀국 전날을 제외한 3일 중 2일을 호텔에 누워 보냈다.
리스본의 상징인 노란 트램이 달리는 소리가 호텔 밖에서 울려도 설레지 않았다.

그저 이불속에서 내 감정을 관찰할 뿐이었다.
왜 나는 기대했던 포르투갈에 왔는데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나는 왜 이렇게 지쳐 있는 걸까?

보통 나는 잠으로 감정을 회복하는 편이다.
힘들거나 슬플 때는 잠이 왔고, 자고 일어나면 대부분 괜찮아졌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자고 일어나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 여행의 기쁨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더 이상 없는 듯했다.

내가 관찰하는 감정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감정은 서운함이다.
서운함이 어려운 이유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지만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니고, 상대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

서운함은 보통 기대치의 차이에서 생긴다.
하지만 그 기대가 나의 욕심인지, 상대의 배려가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서로가 다른 것인지 알기는 어렵다.

산티아고 순례길 에피소드를 글로 정리하면서 나는 하나를 깨달았다.
그 여행에서 내가 가장 많이 소모했던 감정이 바로 서운함이었다는 것을.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산티아고를 완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행복을 여행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관계와 상황들 속에서 내 감정은 조금씩 소모되고 있었다.


나는 보통 기대치를 낮추거나 관계 혹은 상황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서운함을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기대치를 낮춰도 해결되지 않는 서운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서운함을 부러진 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붙고, 어쩌면 이전보다 더 단단해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때도 부러진 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서운함은 부러진 뼈가 아니라 깨진 거울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도 물론 억지로 붙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거울로는 더 이상 같은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이유는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다시 붙일 수 있는 뼈인지, 돌이킬 수 없는 깨진 거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뼈든 거울이든, 깨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깨진 뒤에야 그것이 붙일 수 없는 거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나의 감정을 관찰하는 이유는 머리로 나의 감정을 이해하고 나의 감정을 움직이기 위함이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감정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그것이 나의 감정일지라도.
그저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거울이 아니라 다시 붙을 수 있는 뼈였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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